그랑디디에 컬렉션이 체계적이고 망라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에 전해진 중국도자기에 한한다. 그가 수집을 그만둘 무렵 서구의 중국도자기 시장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부장용 가채도기(加彩陶器) 인형과 당삼채(唐三彩)가 새로 골동시장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청조 붕괴 함께 중국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궁정 컬렉션도 흘러나왔다.
이와 관련해서 기메의 중국도자 컬렉션에는 그랑디디에 이외에 기억해둘 사람이 또 있다. 미셀 칼망(Michel Calmann 1880-1974)이다. 그는 제2제정 시절 파리의 문단을 이끌던 칼망-레비 출판사의 설립자 후손이다. 1836년에 설립된 칼망-레비는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3년 아쉐트에 매각됐다.
미셀 칼망 전시실 모습
그렇지만 19세기후반 이 출판사를 빼놓고 프랑스 근대문학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다. 당시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모두 이곳에서 책을 냈다. 그 명단을 보면 발자크, 보들레르, 뒤마, 플로베르, 위고, 라마르틴느, 에르네스트 르낭, 조르주 상드, 스탕달 등 프랑스 근대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모두 망라돼 있다.
제2제정은 서민 독서의 시대였다. 시민 교양으로 독서가 자리 잡으면서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베스트셀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가 칼망-레비 출판사에서 나왔다. 프레데릭 루비와즈가 쓴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보면 1863년에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가 나왔을 때 이 책은 4년 만에 120만부가 팔리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고 돼있다. 물론 이 책이 칼망-레비사에서 나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미셀 칼망은 평생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출신이 그랬으므로 그가 직업 없이 대 컬렉터가 되었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그의 컬렉션은 양차 대전 사이에 집중됐다. 그랑디디에에 비하면 4,50년의 시차가 있다. 그 역시 체계적인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랑디디에의 컬렉션이 시대적인 한계로 명청 도자기가 중심인 반면 칼망은 고대에서 명까지 고루 수집했다. 기메에는 3층 중국도자실에 그랑디디에 살롱과 칼망 살롱을 구분해서 소개하고 있다. 칼망 컬렉션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당삼채와 송대 자기다.
당삼채 봉수병
당삼채가 역사상 처음 등장한 것은 1905년부터이다. 이때 낙양과 정주사이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낙양 인근의 당대 무덤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도자기가 출토된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 당삼채를 가장 먼저 산 사람은 일본인 다카하시 다이카(高橋太華 1863-1947)이다.
아동문학가인 그는 이 무렵 문학에 흥미를 잃고 중국에 건너와 있었다. 당삼채가 출토되고 반년 쯤나 베이지 시장에 당삼채가 흘러들어왔을 때 그가 가장 먼저 구입했다. 그는 나중에 보스톤 미술관의 동양부장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1863-1913)을 도와 함께 중국에서 보스톤 미술관을 위해 중국 미술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아무튼 기메에는 칼망이 수집한 10여점을 넘는 크고 작은 당삼채 접시가 한쪽 벽에 전시돼있다. 당삼채는 황색, 녹색, 백색 등의 안료를 칠해 낮은 온도에 구운 도기를 말한다. 고대부터 부장품으로 쓰인 토기, 도기(陶器)가 당에 이르러 당삼채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주로 말이나 낙타 등을 형상화한 대부분이다. 접시는 의외로 숫자가 적다. 칼망 컬렉션 가운데 당삼채 대표유물은 보상화문(寶相華文)이 그려진 삼족반(三足盤)이다.
미셀 칼망 수집의 당삼채 보상화문 접시, 당
보상화란 불교 장식에 쓰이는 꽃으로 실제가 아닌 상상속의 꽃이다. 보상화 삼채접시는 알려진 수가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1935년 겨울에 런던에서 사상 최대의 중국미술전시가 열렸을 때 일본이 소장한 중국도자기를 대표해 에세 문고(永靑文庫)가 소장하고 있던 보상화 삼채 접시가 출품됐을 정도이다.
에세 문고는 구마모토 번의 호소카와(細川) 집안에 전하는 서화, 전적, 공예품 등을 보존하는 자료관으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수상의 조부인 호소카와 모리다츠(細川護立 1883-1970) 시대에 설립됐다.
당삼채 소, 당 높이 26cm
칼맹의 당나라 도기컬렉션에서 또 눈길을 끄는 것이 소를 형상화한 삼채 도기이다. 말이나 낙타는 당삼채를 통해 많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웬만한 미술관에는 이들을 한두 점씩 소장하고 있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소는 통 털어서 이것 하나뿐이다. 당나라 때는 말과 소를 잘 그리는 전문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재상까지 지낸 한황(韓滉 723-787)도 소 그림의 명수로 손꼽혔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전하는데 칼맹의 소를 비교하면 골격 모습이 방불함을 알 수 있다.
백자 항아리, 오대
또 특이한 칼맹 컬렉션으로 당 이후의 오대(907-960)에 만들어진 백자 작은 항아리도 꼽을 수 있다. 이는 경덕진에서 만든 것이다. 기메에 소장된 백자 가운데 시기가 가장 이른 것 중 하나이다. 이 백자는 칼맹이 죽은 뒤에 유족이 기증했다. 칼맹은 자신의 컬렉션을 1968년부터 순차적으로 기증했다. 기메에서는 1969년에 그의 기증 컬렉션으로 도록을 발행한 적이 있다.
기메와 세르누치는 알다시피 나란히 동양미술 전문미술관이다. 그래서 소장품 가운데 겹치는 것이 적지 않다. 그 중에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도 있다. 한 곳은 국립이고 다른 한 곳은 시립이라 자칫 자존심 대결이 될 수도 형국이다.
여성 기마격구 채색 테라코타, 당 높이 30cm전후
당나라분묘 출토품인 테라코타 채색인형, 즉 가채용(加彩俑)도 그중 하나이다. 세르누치를 대표하는 채색 토용이 여성 기마주악단이라면 이쪽에는 여성으로 이뤄진 격구(擊毬)팀 채색토용이 있다.
격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골프공만한 것을 상대방 골에 집어넣는 경기이다. 페르시아에서 시작돼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에 전래됐다고 한다. 반대로 서쪽으로 건너가 폴로라고 이름 붙여졌다. 격구가 몇 사람으로 한 팀이 이뤄지는지 알 수 없으나 여기에는 7명이 전시돼 있다. 7명이지만 마지막 하나는 말만 보이고 사람은 없다.
자크 폴랭가기증한 여성기마격구 테라코타의 하나
사실적인 말 표현과 함께 말 위의 여성들도 모두 경기에 열중한 듯 제각기 포즈가 다르다. 설명에는 기마 여인들이 입은 옷은 중앙아시아의 남자들이 입는 원령포라고 돼 있다. 세계적 걸작이라 할 이 여성격구단 토용은 수수께끼의 컬렉터인 자크 폴랭(Jacques Polain)이 기증했다.
벨기에 출신인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브뤼셀에 살고 있으면서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게 여길 정도의 친프랑스주의자(Francolâtrie)라는 정도이다. 그는 루브르, 기메를 포함해 프랑스 내 25개 미술관에 지속적으로 수집품을 기증했다.
2010년 툴르즈의 한 박물관에 18세기의 기마 용구를 기증하면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한 내용을 보면 자신은 미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법학도 출신이라고 했다. 미술 수집은 16살부터 시작됐는데 미술이 좋아서였다고 만했다.
그는 기메에 이 당나라 여성격구단을 포함해 11건의 채색 인물용을 기증했다. 모두 당나라 전반기의 것이다. 그중에는 경주 괘릉 석상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인과 같은 모습을 한 상인 인형도 들어있다.
로베르 루세가 기증한 궁녀와 궁인 테라코타
기메에는 이외에도 당나라 채색인형 기증자가 여럿 있다. 동양미술 딜러 로베르 루세(Robert Rousset)도 적지 않은 수를 기증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1935년에 ‘중국인도회사(La Compagne de Chine et des Indes)’라는 갤러리를 차려 파리에 동양미술을 소개했다. 그 역시 8건 21점의 테라코타 인형을 기증했다.
루이뷔통 그룹 기증의 낙타와 소년캐러반, 당 43.5cm
이색적인 기증자로 루이비통 모에헤네시 그룹 이름도 보인다. 안장 앞뒤로 물통을 잔뜩 싣고 카라반을 떠나는 소년 상인이 올라탄 낙타는 이 그룹에서 2000년에 기증한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