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파리가 사랑한 동양미술관
  • 최열의 그림읽기
  • 영화 속 미술관
  • 조은정의 세계미술관 산책
  • 미술사 속 숨은 이야기
  • 경성미술지도-1930년대
  •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조선의 글씨
  • 한국미술 명작스크랩
  • 도전! C여사의 한국미술 책읽기
  • 왕릉을 찾아서
  • 시의도-시와 그림
  •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타이틀
  • 6-7. 민정 대통령이 모은 일본의 소품 네츠케
  • 1830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가 몰락한 이후 나폴레옹 집안의 사람들은 프랑스를 떠나 외국의 망명생활을 보냈다. 나폴레옹 전처 조세핀의 딸과 나폴레옹의 동생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루이 나폴레옹은 외국을 떠도는 가운데서도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일찍부터 제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을 거쳐 제2제정의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1870년의 보불전쟁에 패해 독일군 포로가 되면서 결국은 폐위되고 말았다.

이로서 제2제정은 막을 내리고 제3공화국이 시작됐다. 공화주의자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1877)가 이때 뽑힌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그는 보불 전쟁의 뒤처리에 동분서주했으나 국민들로부터의 인기는 없었다. 그보다 알사스-로렌 지방을 할양해주었다는 이유로 큰 비난을 받았다. 티에르 정부시절 프롤레타리아 자치정부인 파리 코뮌이 수립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3년 만에 실각했다.
 
정치가와 관계없이 그는 평소에 미술 애호가였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동양 취미에도 관심을 높았다. 생전에 르네상스 걸작회화부터 프랑스 골동 그리고 동양의 미술공예품까지 다양한 장르를 수집했다.


디에르 대통령 수집의 일본 미술품들

그의 소장품은 전임 통치자 나폴레옹 3세의 아파르트망과 거의 나란히 있는 곳에 소개돼 있다. 컬렉션의 성격 때문이겠지만 그가 수집해 기증한 컬렉션이 나폴레옹 3세의 아파르트망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와 같은 92번방에 빈약하게 전시돼있다. 차이나 클로젯 2개가 전부이다.

19세기 후반의 유행처럼 이 유리장 역시 서로 마주보며 세워져 있다. 여기에 약간의 프랑스 골동품에 더해 동양 미술공예품이 들어 있다. 수자는 얼마 되지 않아도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중국은 청동기에서 옥기, 칠보, 인물 장식품 등이 있다. 일본은 칠기, 목조각, 서류함, 네츠케(根付) 등이 들어 있다.

중국 것과 일본 것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1867년 이래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판매를 전제로 출품됐던 미술 공예품이다.
 
잠시 중국과 일본의 만국박람회 참가를 살펴보면 중국이 만국박람회에 선을 보인 것은 1851년에 열린 런던의 첫 만국박람회부터이다. 하지만 이는 정식 참가가 아니었다. 청나라 조정은 애초부터 박람회를 무시했다. 그래서 이를 주최한 영국미술협회는 중국에 있는 영국 무역업자에게 중국물건 출품을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부탁을 받은 이들은 중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박람회에 보일만한 물건을 구했다. 하지만 일자를 맞추지 못해 개막식에는 영국내 여러 컬렉터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과 골동품을 전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1858년부터는 중국내 개항장에서 세관 업무을 관할하던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Robert Hart 1835-1911)에게 이 일이 맡겨졌다. 그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만국박람회에 나오는 중국물건을 수집, 출품했다. 청 정부가 정식으로 참가한 것은 1904년 미국에서 열린 세인트루이스 박람회가 처음이다. 이때 청 황실의 종친인 애신각라 부륜(愛新覺羅溥倫 1874-1927)이 총감독으로 파견됐다.

일본도 1862년에 열린 런던박람회에 미술공예품을 선보였으나 이 역시 정식참가는 아니었다. 당시 주일영국공사였던 러더포드 올코크(Rutherford Allcock 1809-1897)가 자신이 수집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대신 출품했다. 여기에 칠기, 도자기, 잡화, 갑옷, 서화, 전적 등이 들어 있었다. 일본이 정식으로 참가한 것은 나폴레옹 3세의 초대를 받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처음이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만국박람회를 통해 나란히 정식으로 유럽에 소개됐으나 유럽에 남긴 이미지는 전혀 달랐다. 17,18세에 수입된 중국 도자기는 유럽 왕후귀족들을 매료시켰으나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전시품들은 조악한 수준이어서 유럽인들의 시선을 거의 끌지 못했다. 또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나빠진 것도 무관심에 한 몫을 했다. 당시 런던에서는 중국인을 가리켜 존 차이나맨이라고 부르며 멍청한 하층노동자 취급을 했다.   


티에르 수집의 상아인물형 네츠케

티에르가 수집한 중국 공예품도 영국 상인들이 모아 보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청대 후반 들면 중국 골동시장에는 송나라 때의 자기를 모방해 만들거나 고대청동기를 본떠 만든 물건들이 다수 나돌고 있었다. 티에르 수집의 중국 청동기와 자기 그리고 옥기는 모두 이들을 모방한 것들이었다.
 
반면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처음 참가한 만국박람회에서 박람회가 산업기술과 공예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 이를 적극 후원하고 활용했다. 이렇게 출품된 일본의 미술, 공예품은 19세기후반 유럽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또 앞서 소개한 것처럼 자포니즘이란 문화적 유행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만국박람회 연구자 폴 그린할(Paul Grenhalgh)은 서양에서 일본미술의 발견은 주로 1860년 이후, 즉 1862년의 런던 만국박람회 이후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의견은 오사카의 오테마에(大手前)대학의 마쓰무라 마사이에(松村昌家) 명예교수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쓴 『대영제국박람회의 역사』에는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일본공예품은 정부 주도의 참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됐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런던의 신문은 일본의 공예품에 대해 ‘유럽의 최고급품에 비교해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특질을 갖추고 있다’는 찬사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때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잡화에 포함된 네츠케(根付)였다. 네츠케는 남자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담배쌈지나 주머니의 끈 끝에 다는 멈추개 장식을 말한다. 이는 에도시대 초기부터 만들어졌다. 일본 옷에 주머니가 없는 이유로 발명됐다는 말도 있다. 그후 18세기 들어 남자들이 몸치장에 신경을 쓰면서 크게 발전했다. 나무, 상아, 동물의 뼈나 뿔 등을 소재로 사람, 동물 등과 같은 여러 형상을 정교하고 재치 있게 조각해 장식겸 놀이겸으로 대유행을 했다. 

올코크 남작은 당시 자신이 모은 네츠게 600여개를 전시했는데 이는 공식카탈로그에서조차 ‘일본인은 (네츠케)의 디자인과 제작에 가능한 한 최고의 미술적 기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소개했을 정도이다.


일본 게이샤 모습을 새긴 네츠케 
 

티에르 컬렉션에도 이 네츠케가 다수 소개돼 있다. 동자, 게이샤, 중국의 장수, 코끼리를 탄 선녀 모습의 관음보살 등 다양한 모습이다. 네츠게는 티에르뿐만 아니라 그 무렵 파리 상류층 사회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예를 들어 파리 개선문에서 볼로뉴 숲으로 향하는 대로인 포쉬가에 있는, 기메 미술관의 자매 미술관인  데네리 미술관(Musee d'Ennery)에는 이 네츠케가 300점 넘게 소개돼 있다. 이 미술관은 극작가로 이름을 날린 아돌프 필립 데네리(Adolphe Philippe d'Ennery 1811–1899)의 부인 클레망스 데네리(Clémence d'Ennery 1823-1898)가 모았다가 기메에 유증하면서 설립된 저택미술관이다.
 
루브르에 있는 티에르 수집의 네츠케 역시 다른 컬렉션과 함께 1880년 그의 부인이 죽으면서 루브르에 유증한 것들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7:13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