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피라밋이 루브르의 상징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는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유리 피라밋은 1989년 중국계 미국건축가 I.M,페이가 지었다. 루브르에서 이것이 가장 최근의 개수 공사이다. 그 이전에도 루브르는 몇 번의 증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외형을 갖추게 됐다.
유리 피라밋 이전의 공사는 제2제정의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1808-1873 재위 1852-1870) 때의 것이 가장 컸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루브르는 ㅁ자로 된 슐리관 에 드농관 일부가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슐리관에서 튈르리 공원 쪽을 바라보면 루브르 보다 훨씬 큰 튈르리 궁이 있었다. 루이14세 시절부터 루브르와 이 튈르리 궁을 잇자는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지사인 오스망(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 남작을 시켜 파리시를 대대대적으로 개조하면서 이 계획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래서 드농관의 모나리자 전시실이 있는 부분을 증축했고 반대편의 리슐리관도 지었다. 또 리슐리관에 붙여서 마르샹관도 지었다.(앞서 소개한 대로 마르상관에는 오늘날 장식미술관이 됐다. 그러나 정작 튈르리 궁은 제2제정이 끝난 1871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파리 시민들이 사랑하는 튈르리 공원이 들어섰다)
그는 이런 공사를 하면서 리슐리관에서 튈르리 궁이 보이는 모퉁이에 자신의 집무실을 만들었다. 대응접실, 식당, 소응접실 그리고 부속실을 갖춘 이 집무실은 보통 나폴레옹 3세의 아파르트망으로 불렸다. 집무실 공사는 1852년부터 시작돼 1857년에 끝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이전까지 그의 주된 거처는 대대로 프랑스 왕가의 왕궁으로 쓰인 파리 남쪽의 퐁텐블로 성이었다. 새로 마련한 루브르의 리슐리관의 아파르트망은 그가 대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나폴레옹 3세의 대응접실
1870년 보불전쟁에 패해 제2제정이 막을 내리자 그의 집무실은 프랑스 재무성으로 쓰였다. 이것이 루브르에 이관돼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90년 이후이다. 그러니까 I.M.페이의 유리 피라밋이 세워지고 루브르가 재단장될 때 유명한 나폴레옹 3세의 아파르트망도 재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루브르에서 이 방에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그 호화로운 장식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공화정을 뒤엎고 세운 제정(帝政)인 만큼 나폴레옹 3세는 도처에 자랑스러웠던 프랑스 과거의 영광을 재현코자 했는데 이 방도 그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실내 장식은 루이14세 양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제2제정의 제왕적 장식 취향을 고스란히 살렸다.
외젠느 황후의 초상화가 걸린 벽
화려한 조각과 실물크기의 대형 초상화, 한껏 사용한 금박 장식, 짙푸른 황실 문장이 들어간 융단 그리고 진홍의 천을 입힌 황금색 가구와 천장에서 드리워진 대형 상들리에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다. 이곳은 평소에 응접실로 사용했지만 필요할 때는 극장으로도 쓰였다. 옆에 있는 작은 응접실까지 넓히면 250명이 충분히 들어갔다고 한다.
황후 초상화 아래의 이마리 긴난데 도자기
이 응접실에 루이14세풍의 여러 미술공예품이 곳곳에 장식돼 있다. 그 가운데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도 섞여있다. 아리따운 외젠느 황후(Empress Eugénie 1826-1920)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벽 아래의 장식 선반에는 일본의 이마리 도자기 3점이 놓여있다. 제2제정의 취향대로 금박이 들어간 이마리의 긴난데(金蘭手)들이다.
나폴레옹 3세의 초상화가 있는 벽 앞에도 작은 탁자가 있고 도자기가 놓여 있다. 이는 호리병을 사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 인물이 그려져 있다. 중국은 청대 들어 다시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면서 거꾸로 일본 도자기를 모방했다.
일본으로 수입처를 바꾼 유럽 고객의 취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즉 징더전의 민간 가마에서 일본의 이마리 양식을 그대로 만들어 수출한 것이다. 나폴레옹3세 초상화 밑의 도자기는 이런 종류이다.
응접실 안쪽 창가에 장식된 일본풍의 중국도자기
또 한 쪽 벽에 놓여있는 뚜껑 있는 항아리도 그렇다. 연꽃과 같은 물가의 여러 꽃을 그린 문양이다. 이 역시 여백을 많이 남기고 문양이 간결하게 처리한 이마리 자기를 중국식으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작은 응접실로 돌아가는 복도에는 징더전에서 청나라 들어 많이 만든 중국소설 소재의 문양을 넣은 오채자기가 놓여있다.
복도에 놓인 중국소설 한 장면의 오채도자기
이 방을 꾸미는데 위젠느 황후가 어떤 어드바이스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후도 동양 취미가 상당했다. 퐁텐블로 궁에 중국 방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중국 도자기, 가구, 옥기 등 자신이 수집한 것을 진열해 놓곤 했다. 이 중에는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프랑스군의 베이징 원명원 약탈 때 흘러나온 것을 구입한 것도 포함돼있었다.
자신의 집무실을 동양도자기로 가득 장식한 나폴레옹 3세는 파리에 자포니즘의 유행을 가져온 1867년의 만국박람회 때 일본 막부, 쓰시마번 그리고 사가번을 공식 초청한 장본인이기도 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