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 섬에는 그다지 알려져 않는 관광지가 하나 있다. 파리의 주요 법원이 들어있는 팔레 드 주스티스의 일부인 지하감옥 콩시에즈리(Conciergerie)이다. 이곳은 프랑스혁명 때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가 갇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마리 앙트와네트 흉상과 중국도자기
이 지하 감옥은 원형대로 보존돼 있는데 그 중의 한 방에는 작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인형 하나가 벽을 바라보고 앉은 모습으로 놓여있다. 그녀가 바로 마리 앙트와네트이다. 이 인형 뒤에는 역시 혁명군 옷을 입은 군인 마네킹이 그녀를 감시하듯이 서있다. 그녀는 프랑스혁명 직후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달아나다 붙잡혀 이곳에서 1년여를 지낸 뒤 마침내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혁명 이전부터 파리 시민들의 미움을 받았다.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인데다 자유분방한 때문이었다. 또 사치가 심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에 자유분방하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있었지만 사치스럽다는 말은 변명거리에 불과했다. 당시는 왕실에게 귀족에 이르기까지 전부 사치에 빠져 있었다. 그랬음에도 유독 그녀만이 미움을 산 것이다.
결정적으로 민심이 돌아서게 된 계기는 나중에 괴테가 ‘프랑스 혁명은 여기서 시작됐다’고 말한 목걸이 사건이다. 이 일은 정치적 야심이 있던 로앙 추기경이 사기꾼 가짜 백작부인에게 속아 넘어가 왕비에게 선물한다며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서 허공에 날린 사건이다. 2백만 리브르에 달하는 목걸이 사기사건이 폭로되자 가뜩이나 마리 앙트와네트를 싫어하던 파리 시민들은 그녀의 연루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목걸이와 무관했다. 문제의 목걸이는 그보다 앞서 보석상이 마리 앙트와네트에 직접 팔려고 시도했다 실패한 적이 있어 애초부터 관련이 없었다. 마리 앙트와네트를 다룬 책이나 소설은 모두 이 스캔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대개는 그녀의 입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 컬렉션만 해도 충분해요. 더 이상은 필요 없어요’라는 식으로 무관함을 밝히는 게 보통이다.
그녀는 다이아몬드만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 무렵 그녀는 많은 것을 모았다.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는 이국에서 시집온 그녀에게 베르사이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을 선물했다. 그녀는 이 궁을 사치스럽게 꾸몄다는 구설수에 올랐으나 실은 달랐다. 그녀는 궁의 정원을 중국식 정원을 본떠 비대칭적인 사라와지(Sharawadgi) 양식으로 꾸몄다. 이는 당시의 프랑스에는 보기 드문 것으로 이를 보러오겠다고 귀족들이 몰려들면서 사치란 말이 나온 것이다.
[참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애용한 에도시대의 오이형 향합(베르사이유궁국립박물관 소장)
다만 그녀도 그 무렵 유럽 왕후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도자기의 방’을 만들어 즐긴 것은 사실이다. 도자기만 모은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수입된 작은 칠기상자도 모았다. 이들 작은 소품은 2004년 여름 일본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 소개되기도 했다.
루브르에는 베르사이유 시절 살았던 방의 일부와 그녀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다. 슐리관 맨 끝에 있는 63번방과 64번방이다. 63번방에는 동양 분위기가 물씬한 소품들이 진열돼 있다. 전부 일본의 칠기들이다.
마리 앙트와네트 컬렉션의 에도시대 벼루상자
제일 아래에 있는 것은 에도 시대의 쇼군을 비롯해 다이묘들이 사용하던 벼루 상자(硯箱)이다. 칠만 입힌 것도 있지만 상류층을 위한 것은 이처럼 칠 위에 금은 가루로 장식을 한 이른바 마키에(蒔繪)기법을 썼다. 일본에서의 제작은 1700년에서 1725년 무렵이다.
이를 수입해 1785년에 파리의 명장인 프랑스와 레몽(François Rémond 1747-1812)이 황동 장식을 더했다. 그는 고대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인물조각을 한 기둥으로 촛대 등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 벼루상자의 다리도 인물 형상을 한 다리로 받쳐져 있다.
이 작업을 주관한 사람은 도미니크 다게르(Dominique Daguerre 미상)이다. 그는 동양의 수입품을 가공해서 팔았던 마르상 메르시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자였다. 그의 단골 중에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형부, 그러니까 바로 위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Maria Kalorina 1752-1814)의 남편 나폴리왕 페르디난도 4세(Ferdinando Ⅵ 1751-1825, 그는 시칠리왕도 겸해 시칠리왕으로 불릴 때는 페르디난도 3세라고 한다)도 있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 구장의 일본 칠기병과 재상 마자랭 구장의 향로(위쪽)
벼루상자 양쪽 위에 있는 병 역시 일본제 칠기이다. 이 병들도 파리에서 황동 장식이 더했다. 이들은 마리 앙트와네트 이전에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맨 위쪽에 있는 것은 받침에 지붕까지 갖춘 향로이다.
이 역시 일본 칠기에 황동 장식을 더했다. 이는 루이13세 사후 섭정이 되어 프랑스를 이끌며 어린 루이14세의 교육을 맡았던 추기경이자 재상이었던 줄 마자랭(Jules Mazarin 1602-1661)이 가지고 있던 유서 깊은 것이기도 하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소장했던 강희제 때 만든 청유(靑釉)자기
마리 앙트와네트의 흉상이 있는 방이 64번방이다. 흉상은 나중에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그 주위에 놓인 푸른 앵무새와 푸른색 각병은 마리 앙트와네트 시절에 프랑스에 건너온 중국 도자기들이다. 강희제 시절에 만든 청유 자기이다. 각병 위에 더해진 화려하고 섬세한 황동장식은 물론 1785년경에 파리에서 더해졌다.
일본 칠기 나무판을 사용해 만든 마리 앙트와네트의 서탁
이 방에 있는 서탁(書卓)도 도미니크 다게르가 마리 앙트와네트를 위해 만든 것 중 하나이다. 이는 당시 이름난 에베니스트, 즉 소목장이었던 아담 바이스바일러(Adam Weisweiler 1750경-1810년 이후)가 만들었다. 측면은 철을 사용하고 다리는 청동을 쓴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수입된 칠기 판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키에(蒔繪)기법으로 장식된 서탁 책받침
국화문양 사이로 작은 자개를 채운 목판 안에 물가의 누각이 있으며 그 안에 사람 둘이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누각 뒤쪽에는 소나무가 큰 가지를 뻗고 있으며 하늘 저편으로는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다.
이런 소재는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는 한 번도 회화나 장식 문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서탁은 베르사이유가 아니라 혁명 이전 생클루 성의 마리 앙트와네트 서재에 놓여 있던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