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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장. 루브르 - 프랑스, 유럽 공예품에 깃든 동양미술
  • 1979      
6-1. 알려지지 않은 루브르의 시누와즈리 도자기

루브르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모나리자이고 비너스이다. 말할 것도 없이 루브르는 서양미술의 보고다. 이곳에 동양미술이 있다고 하면 아마 대개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집트 미술이 동양에 속하는가 하면서.  
  
그렇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루브르는 프랑스 동양미술의 또 다른 보고였다. 전쟁이후 프랑스 정부가 국립박물관들의 교통정리를 하면서 루브르에 있던 동양미술을 전부 옮겼다. 기메 미술관에 있던 이집트 미술을 가져오면서 그쪽으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메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동양미술 전문미술관이 됐고 루브르는 나폴레옹 시대의 유물에 더해, 유럽에서 손꼽히는 이집트미술을 자랑하게 됐다. 
 
이 정리로 인해 루브르에는 명목상 동양미술은 남아있지 않게 됐다. 흔히 동양미술하면 오리엔트, 이스트-아시아를 연상하는데 그렇다면 미들-이스트는 어떤가. 루브르의 이슬람미술 전시실은 2003년에 드농관 지하1층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메소포타미아 유물로 유명한 날개 달린 황소

그렇지만 이전부터 중동 미술은 루브르의 또다른 자랑거리였다. 19세기후반 중동의 고대유적 발굴에 나섰던 프랑스 탐험대가 가져온 것들로 날개가 달린 거대한 황소 조각이나 사자를 포획한 영웅 릴리프와 같은 유물은 유명했다. 이들은 장식미술관으로 이어지는 리슐리관 1층(프랑식으로 말하면 0층에 해당하는 레드쇼세다)에서 메소포타미아 미술과 이란 미술 코너에 나누어 소개돼 있다. 

새로 생긴 드농관 지하의 이슬람 전시실과 이곳의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미술을 제외하면 그보다 동쪽의 미술은 루브르에 공식적으로 없다.(참고로 기메 미술관은 이란을 경계로 그보다 동쪽인 아프가니스탄 미술부터 소개하고 있다)


나폴레옹 3세의 대응접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루브르에 소개하고 있는 공예미술 코너에 알게 모르게 이들이 들어있다. 루브르에서 공예파트는 그다지 인기 있는 곳이 아니다. 관심이 있다면 호화찬란한 나폴레옹 3세의 대응접실 정도이다.

이 대응접실을 포함해 루브르의 공예 전시실은 슐리관 2층 일부와 리슐리관 2층에 걸쳐있다. 매표소인 지하 1층에서 리슐리관 입구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바로 2층까지 올라가면 좌우로 펼쳐져 있는 전시들이 모두 공예파트이다.



루브르의 공예전시실 지도

이들은 무려 96개방에 이른다. 소개 범위는 17세기까지는 유럽 전체를 다뤘고 그 이후는 프랑스만이 대상이다. 프랑스 쪽에서는 17세기, 루이14세와 혁명이전 그리고 나폴레옹3세 시대로 구분된다.

물론 여기서도 동양미술은 타이틀로 한 전시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각 방의 전시물 사이에 확실히 있다. 특히 17세기 유럽도자기, 프랑스 루이14세와 15세 시절의 궁중공예 그리고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제2제정 시대의 가구와 공예에도 들어있다.  
 


메디치가에서 만든 연질 청화백자(1575-1587년 사이)

먼저 17세기 유럽도자기이다. 이곳 전시품은 세브르가 소개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양이 많다. 당연히 거의 모든 지역이 빠지지 않고 망라돼있다. 동양과 관련된 도자기는 세브르에서처럼 동양을 모방해 만든 도자기부터 시작한다.(세브르와 중복되는 것도 적지 않다)

동양관련 도자기의 첫 번째는 여기서도 메디치가(家)에서 흉내 낸 청화백자이다. 소나무에 사슴 문양까지 그려 넣은 청화백자 병이 있다. 이는 메디치가가 피렌체의 공방에서 1575-1587년 사이에 중동을 통해 수입한 중국의 청화백자를 보고 만든 것이다. 물론 연질 백자이다. 색깔만 백자를 닮았을 뿐 속은 백자 태토와는 전혀 무관하다.


델프트에서 오채도자기를 본떠 만든 다색 도자기

다음은 1680년경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만든 도자기이다. 이 코너에는 청화백자를 모방한 델프트청화백자 이외에 명나라 오채 도자기를 본떠 여러 채색 유약을 시도한 도자기들이 있다. 이들 역시 125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자기가 아니지만 그냥 통칭 ‘델프트 자기’라고 한다.

그중 하나인 접시를 보면 중국을 상징하는 국화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국화문양 사이로 중국 복장을 한 인물도 보인다. 메디치가의 청화백자도 그랬지만 델프트에서도 동양적 문양, 예컨대 소나무, 사슴, 국화 등에 중국 복장의 인물을 그려 넣어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느베르에서 만든 중국인물문양 병, 1680년경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느베르에서 구운 병에도 중국 인물이 보인다. 느베르는 파리와 리옹 사이에 있는 도시로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이탈리아의 파이앙스 기법을 받아들인 곳이다. 이 병에는 이색적이게도 관모를 쓴 중국 관리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뒤인 18세기 들어서 프랑스 루앙에서 만든 다색 유약의 파이앙스에도 중국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루앙 제작의 중국풍 접시, 1700-1750년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시느와즈리를 반영한 도자기들이다. 당시 중국은 유럽에서 매우 강력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수도사들이 보내온 서신의 내용은 이런 동경을 한층 부추기고 있었다.

유럽 선교사들이 중국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582년이다. 이 해 예수회소속 이탈리아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중국명 利瑪竇)가 인도 고아를 거쳐 마카오에 상륙했다. 리치는 우선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중국에 대한 사정도 익혔다.

마카오는 1557년부터 포르투갈인의 거류가 인정된 이래 동방포교를 목표로 한 선교사들의 거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후 리치는 광동지방을 전전하며 포교활동을 벌이다 마침내 1601년 베이징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황제의 포교허가를 얻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지도를 제작해 보였고 수학과 자연과학과 같은 서양의 최신 지식을 명말 지식인에게 소개하면서 이들의 도움으로 끝내 만력제의 알현에 성공하고 포교허가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리치는 1610년에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선구적 활동 덕분에 이후 예수회 수도사들이 그의 뒤를 이어 잇달아 중국에 건너왔다. 1627년에는 독일인 예수회수도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2-1666 蕩若望)이 베이징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펼쳤다. 천체 관측에 대한 지식과 대포제작 기술 등을 알고 있던 그는 숭정제를 알현하고 자신의 지식을 명의 학자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그는 명이 멸망한 뒤에도 남아 청의 천문대를 관할하는 흠천감의 감정(監正, 장관직)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무렵 그를 보좌했던 수도사가 벨기에 출신의 페르디낭 베르비스트(Ferdinand Vervbiest 1623-1688, 南懐仁)였다.

베르비스트는 아담 샬에 이어 흠천감에서 일했는데 그는 부베(Joachim Bouvet 1656-1730, 白晉)와 마찬가지로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강희제 궁정에는 이들을 포함해 10여명 넘는 유럽 수도사들이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을 때에는 게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1654-1707, 張誠 프랑스)과 페레이라(Thomas Pereira 1645-1708 徐日昇 포르투갈) 같은 수도사들이 멀리 네르친스크까지 파견돼 통역을 맡기도 했다.

그 외에 마갈라에스(Gabriel de Magalhaes 1609-1677, 安文思 포르투갈), 부글리오(Lodovico Buglio 1606-1682, 利類思 이탈리아), 그리말디(Claudio Filippo Grimaldi 1638-1712 閔明我), 토마스(Antoine Thomas 1644-1709, 安多), 퐁타네(Jean de Fontaney 1643-1710, 洪若翰 프랑스), 비스델루(Claude de Visdelou 1656-1737, 劉應 프랑스) 등 각국 선교사들이 강희제의 궁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참고]  『중국전지』 3권에 소개된 중국의 외국인 선교사들.(왼쪽부터 마테오 리차, 아담 샬 그리고 페르디낭 베르비스트)
  

이들도 그랬지만 당시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겪은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보고하는 서간을 속속 파리의 예수회 본부로 보내왔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간행된 책이 『예수회선교사 서간집』이다.

이 책은 1702년부터 1776년까지 34권이 발행되면서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 중국에 관한 지식을 넓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이 책의 편찬을 맡았던 사람 중 한 사람 장-밥바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이다. 그는 이때 얻은 지식을 가지고 별도로 『중국전지(中國全誌)』를 펴냈다.

서간집도 그렇고 중국전지도 당시 중국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베스트셀러처럼 읽혔다. 이런 책들이 지식인층, 상류층에서 읽히는 사이에 유럽 각지에서 중국인과 중국을 상징하는 도상을 그려 넣은 도자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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