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니즘 방에서 엘리베이터 앞 복도를 지나 ㄱ자로 꺾인 곳이 아르누보 방이다. 아르누보는 이 시대에 자포니즘의 영향 아래 탄생한 새로운 미술을 가리킨다. 유리 공예를 비롯해, 보석, 포스터 등이 아르누보의 이름 아래 만들어졌다.
에밀 갈레가 만든 유리꽃병 <달빛>
이 방과 자포니즘 방을 관련성을 유물 자체로 말해주는 것이 자포니즘 방 끝부분에 놓여있는 유리 화병이다. 이는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 Émile Gallé 1846-1904)의 솜씨이다.
블로잉 기법을 써서 원형과 원통을 합친 듯한 특이한 외형을 보이는 대작이다. 그 위에 칠보 기법으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표현했다. 이 화병은 그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목은 <달빛>.
갈레는 낭시 출신으로 파리에 나오기 전부터 일본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낭시의 수리임업학교(水利林業學校)에는 지리학자이자 남화가인 다카시마 홋카이(高島北海 1850-1931)가 유학 와있으며 서로 알고 지냈다.
갈레가 그려 넣은 잉어도 『호쿠사이 만화』에 나온다. 『호쿠사이 만화』 제1권에 ‘어람관음(魚濫觀音)’이란 제목으로 큰 잉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어람관음’이란 그가 잘못 적어 넣은 말이다. 원래는 넘칠 람(濫) 자가 아니라 대바구니 람(籃) 자이다.
『호쿠사이만화』 제13권의 어람관음
어람관음(魚籃觀音)이란 33가지로 변신하는 관음보살의 하나로 중국에서는 액운을 쫓아주는 보살로 널리 받들어졌다. 보통은 물고기 등에 올라탄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본에서도 절에서 이를 조각으로 만들어 모신 사례가 적지 않다. 글자는 틀렸지만 호쿠사이는 잉어 머리를 크로즈업한 독특한 구도로 그렸는데 이런 포인트는 갈레에게도 그대로 재현돼있다.
자포니즘의 영향 아래 탄생한 아르누보에는 일본 미술에 자주 나오는 동식물이 모티프로 쓰인 것이 특징이다. 동물로 보면 학, 참새, 잉어, 은어, 연어, 잠자리, 게, 나비 등 주로 등장한다. 식물은 나팔꽃, 등나무꽃, 벚꽃, 붓꽃, 소나무, 대나무, 매화, 해바라기, 수초 등이다.
『미의 자포니즘』에서 미츠이 히데키(三井秀樹) 교수는 1850년 이전의 서양미술에는 이런 동식물 문양이 등장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문양으로 사용한 새로운 미술은 프랑스에만 그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시도됐다.
독일은 이를 유겐트 스틸이라고 불렀고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이라고 했다. 문구점을 하던 티파니가 일본 유래의 동식물 문양이 든 은제품을 만들어 유명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티파니는 다분히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에밀 갈레의 아르누보 유리공예와 일본 공예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르누보 방 앞쪽의 전시 케이스
아르누보 방 앞에는 진열 케이스가 둘 있다. 하나는 아르누보 유리공예이다. 다른 하나는 아르누보 풍으로 제작된 도자기이다. 유리 공예는 에밀 갈레의 작품 외에 돔 형제로 불리는 오귀스트 돔(Auguste Daum 1853-1909)과 앙토넹 돔(Antonin Daum 1864-1930)의 작업이 소개돼 있다.
에밀 갈레가 1900년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아프리카나 화병
여기에 분명히 잠자리, 나팔꽃, 매화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다. 동양에서나 볼 수 있는 호리병 형태를 한 도자기도 이 시기에 동양적 문양과 함께 만들어졌다. 알사스 출신으로 원래 조각을 공부한 뒤에 세브르 공방의 대표적인 아르누보 디자이너가 된 레옹 칸(Leon Kann 1859-1925)의 작업이다. 그는 만국박람회에 대거 출품된 일본의 조각적 공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레옹 칸이 세브르에서 디자인한 달팽이가 있는 표주박병(1901년 제작)
옆의 도자기 진열장에도 물고기 문양의 도자기가 있다. 『호쿠사이 만화』에서 따온 낚시하는 사람 문양도 보인다. 이를 만든 사람은 세브르의 도자기 도안사였던 알베르- 루이 다무즈(Albert- Louis Dammouse 1848-1926)이다. 그 역시 브라크몽과 가까웠다. 그는 세브르를 나와 잠시 샤를 지로의 지인인 미국인 찰스 에드워드 하빌랜드가 운영하던 리모주의 도자기 회사에서도 일했다.
알베르-루이 다무즈 도안의 물과문양 도자기와 낚시하는 사람 도자기
아르누보는 이처럼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애초에 이는 일본미술품 전문가게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가게 주인은 독일인 사무엘 빙(Samuel Bing 1838-1905)이다. 함부르크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프랑스의 도자기와 유리 공예품을 수입하던 상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지그프리트. 파리에는 1854년에 왔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본 뒤 그는 사업을 바꿨다. 프랑스 물건을 사서 독일로 보내는 일을 그만 두고 동양미술, 공예품의 수입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참고 1] 빙의 아르누보 가게 입구
1884년 쇼사가에 일본 미술(L'Art japonais)라는 가게를 냈다. 이 무렵 직접 물건 구매를 위해 3번이나 일본에 갔었다. 빙의 가게는 일본 취향에 빠진 화가, 문인, 저널리스트, 컬렉터들의 사랑방이 되다시피 했다. 그 후 1895년에 프로방스가 22번지에 더 넓은 가게를 냈다. 이때 가게 이름이 ‘아르누보(Art nouveau)'였다.
빙은 이 가게에서 일본미술 외에 르네 라리크(René Lalique 1860-1945)와 같은 동시대 작가의 유리 공예품과 티파니의 물건도 다뤘다. 그래서 이곳에서 작품을 가져와 팔거나 또 이곳에 판매, 진열된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보인 새로운 경향의 작업을 통 털어 아르누보라고 부르게 됐다.
빙 자신도 일본 미술에 심취해 1888년5월부터 1891년4월까지 호화 월간지인 『예술의 일본(Le Japon artistique)』을 펴냈다. 이 역시 이시대의 미술을 아르누보고 이끄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 2] 1889년에 나온 『예술의 일본(Le Japon artistique)』 표지
그는 1888년 자신의 가게에서 파리에서 처음으로 우키요에 단독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890년에 파리 에콜 드 보자르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어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고흐가 우키요에 판화를 처음 본 것도 빙의 가게에서였다. 빙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거래처가 있었다. 오늘날 벨기에 왕립미술역사박물관에 있는 4천여 점의 우키요에 소장품은 대부분 빙의 가게에서 산 것이다. 물론 장식미술관의 소장품 상당수도 그의 수집품인 것으로 전한다.
빙은 그런 점에서 19세기후반 파리에 자포니즘이라는 동양 취향이 중산층 사이로 확산되는데 누구보다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리 장식미술관의 동양미술은 네덜란드를 통해 파리에 들어온 중국 도자기와 그를 모방해 만든 프랑스와 유럽 도자기 그리고 빙이 중심이 됐던 아르누보 미술에서 끝이 난다. 이 동안 시누와즈리와 자포니즘이 차례로 유행하고 또 파리지엥을 매료시켰으나 거기에는 중국과 일본만 있다. 한국의 조선미술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절 조선은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이전이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