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술관에는 컬렉터의 기증 정신을 기려 전시실에 기증자 이름을 붙인 곳이 두 곳 있다. 하나는 잔느 랑방(Jeanne Lanvin 1867-1946)의 이름이 붙은 방이다. 랑방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향수회사 랑방의 설립자이다. 그녀는 1924년 당시 이름난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아르망-알베르 라토(Armand-Albert Rateau 1882-1938)를 불러 자신의 살림집 겸 작업실을 꾸며줄 것을 부탁했다.
아르망-알베르 라토가 꾸민 잔르 랑방의 거실
그녀는 라토가 실내 디자인한 집에서 결국 생을 마감했는데 라토가 꾸민 그녀의 집은 20세기초 파리 상류층 집안의 인테리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집은 1985년 유족에 의해 장식박물관에 기증됐고 ‘아르망-알베르 라토가 꾸민 잔느 랑방의 거실’이란 긴 이름의 전시실로 재탄생했다.
또 하나는 ‘위젠느 그라세의 식당(La salle à manger d'Eugène Grasset)’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전시실이다. 이 전시실은 4층 41번방에 해당한다. 전시실 이름은 이렇지만 랑방과 달리 그라세(Eugène Grasset 1845-1917)가 집주인이 아니다. 집주인은 그의 친구였던 샤를 지로(Charles Gillot 1853-1903)이다.
위젠느 라세의 식당
그라세는 스위스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장식 미술가였다. 파리에 나와 활동하면서 이름을 떨치며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집트 여행을 한 이후부터 동양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 일고 있던 동양미술 붐에 따라 아시아 미술과 일본 판화 등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취미가 같았던 샤를 지로와 교류하게 됐다.
지로는 1879년 그라세에게 파리 6구의 마담가 79번지에 있는 자기 집의 인테리어와 가구 제작을 부탁했다. 자신이 모은 동양 미술품을 즐길 수 있는 집을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다. 그라세는 그를 위해 장식장과 의자 등을 새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지로가 죽은 뒤에 딸의 부탁으로 식탁 테이블도 제작했다.
그라세가 디자인한 동양풍 장식장
이 방에 있는 그라세의 장식장과 식탁 테이블은 19세기 후반 파리에 유행했던 동양 취미, 특히 자포니즘의 영향이 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라세가 만든 장과 테이블 위에는 지로가 모았던 것과 같은 중국과 일본 불상 그리고 도자기, 청동 화병 등이 그대로 재연돼 있다. 이 역시 당시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물론 이 중에는 지로 소장품이 아니라 훗날 다른 컬렉터에 의해 기증된 유물도 포함돼 있다.
그라세에게 동양풍 가구를 부탁한 지로는 당시 파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동양미술 컬렉터였다. 그의 본업은 인쇄업이었다. 인쇄는 아버지 피르맹 때부터 시작됐다. 판화가였던 피르맹은 아연판을 부식시켜 인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를 지로가 컬러 인쇄가 가능한 사진제판기술로 발전시켜 시대의 수요에 부응하며 큰돈을 벌었다.
그가 동양미술은 만나게 된 것도 인쇄를 통해서였다. 1885년 프랑스 여류시인이자 소설가인 주디트 고티에(Judith Gautier 1845-1917)가 『잠자리 시집(蜻蛉集)』을 펴냈다. 이는 1871부터 1880년까지 10년 동안 파리에 유학했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1849-1940)가 유학생활이 틈틈이 일본의 고대 시가를 불어로 초역해놓은 것을 그녀가 입수해 운율에 맞춰 손을 보아 출판한 것이다.
야마모토 호스이 그림이 들어간 『잠자리 시집(蜻蛉集)』 표지
사이온지는 파리에 있을 때 유럽 시찰을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눈에 들어 귀국해 정계에 입문했다. 히로부미의 심복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어쨌든 나중에 수상에까지 올랐다. 그는 스미토모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가업을 거대 재벌로까지 일으켜 세운 스미토모 슌스이(住友春翠 1865-1926)의 둘째형이기도 하다.
고티에는 이 책을 내면서 당시 파리에 와있던 일본인화가 야마모토 호스이(山本芳翠 1850-1906)에 의뢰해 페이지마다 삽화를 그리게 했다. 이 책을 지로가 컬러로 인쇄한 것이다. 그가 일본 미술에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호스이에 대해 잠깐 소개하면 그는 어린 시절 『호쿠사이 만화』를 보고 화가가 되고자 했다. 처음에는 일본 남화(南畵)를 그렸다. 그러던 중에 그 역시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면서 일본정부의 박람회사무국 임시직원으로 뽑혀 파리에 오게 됐다. 박람회가 끝난 뒤 그는 귀국하지 않았다. 파리에 눌러앉아 에콜 드 보자르에 들어가 서양화를 배운 것이다.
그가 귀국한 것은 한참 뒤인 1887년이다. 이때 일본이 프랑스에 발주한 군함 우네비(畝傍)에 프랑스 생활 10년 동안 그린 그림 3,4백점을 실어 운송을 맡겼다. 그런데 이 배가 싱가폴을 지나 남지나해에서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이들 작품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에 관한 에피소드 중 또 유명한 것이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에게 화가의 길을 권유한 일이 있다. 구로다는 나중에 도쿄미술학교 교수가 돼 일본 아카데미즘을 확립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제자 중에 나중에 한국의 첫 번째 서양화가가 된 고희동(高羲東 1886-1956)이 있다.
재주가 많았던 호스이는 요리도 뛰어나 파리에 일본 유학생이 적었던 시절 고향음식이 생각나면 모두 호스이의 하숙으로 모였다. 법학을 공부하러온 구로다도 호스이 집을 드나들었다. 호스는 구로다의 그림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화가의 길을 강하게 권했다.
지로는 고티에의 시집출판을 계기로 그 다음해 자신이 내던 컬러인쇄 잡지 『파리 일뤼스트레(Paris illustré)』에 대대적인 일본 특집을 실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1806)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글은 당시 일본미술 붐의 중심에 있던 하야시 다다마사(林忠正)가 직접 썼다.
이런 일을 하면서 지로는 자포니즘 심취자들과 교류하게 됐고 또 컬렉션을 불려나갔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컬렉션은 경매를 통해 모두 처분됐다. 경매는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04년 봄에 열렸다. 인상파그림 전문화랑으로 유명한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 주관해 파리의 경매회사 드루오를 통해 처분됐다.
지로 컬렉션의 경매카탈로그 표지와 안쪽의 지루 사진
이때 나온 2권의 카탈로그에는 무려 3,453점이나 되는 중국과 일본 미술품의 리스트가 실려 있다. 일부는 사진도 실려 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일본의 미술공예품들로서 조각, 칠기, 도자기, 회화, 탈, 의상, 무구 등으로 분류됐다.
공쿠르 형제는 당시 지로의 컬렉션을 가리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정교한 일본미술 컬렉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로 컬렉션은 그 무렵 파리 최고의 일본미술전문 미술상이었던 사무엘 빙(Samuel Bing 1838-1905)이 나서서 감정했다. 감정을 맡았지만 상당수는 빙의 가게에서 지로가 직접 구한 것들이기도 했다.
카달로그 서문에는 1891년과 1892년부터 샤를 지로가 빙의 가게를 드나들었다고 했다. 당시 빙의 가게에는 지로를 비롯해 하야시 다다마사의 절친이자 루브르 친구들회의 사무국장이자 컬렉터인 레이몽 케를랑(Raymon Koechlin 1860-1931), 방돔 광장의 보석상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2) 등 쟈포니즘에 심취한 단골들이 번질나게 드나들고 있었다.
베베르는 지로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이름난 우키요에 컬렉터였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우키요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두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베베르의 컬렉션은 시대와 작가를 망라해 1만 여점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한다.
이 컬렉션의 대부분은 현재 일본에 전한다. 베베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기 소장품을 모두 챙겨 도버 해협의 르아브르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거기서 런던에 와있던 일본인 컬렉터 마쓰가타 고지로(松方幸次郞 1860-1950)와 접촉해 소장품 전부를 그에게 넘겼다. 베베르 컬렉션은 이렇게 해서 마쓰가타의 귀국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리고 그 후 마쓰가타가 사장으로 있던 고베조선소가 파산하자 대부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베베르 컬렉션에서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도리 기요나가(鳥居淸長 1752-1815)의 <욕탕>이다. 이는 체르누스키 미술관의 설립자 체르누스키와 함께 아시아를 여행했던 데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 1838-1927)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체르누스키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부러 호쿠사이의 옛 집을 찾아갔을 정도로 일본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집 마당에 서 있는 동백나무를 보고 감개무량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화가였던 그는 나중에 가업을 이어 코냑업자가 됐으나 이 사업이 파산하면서 그가 모은 판화, 미술품 등을 모두 내놓아 경매로 처분했다.
이때 나온 기요나가의 <욕탕>은 전 세계에 3점 밖에 없는 것 중 하나로 베베르가 이를 5천 프랑을 주고 구입했다. <욕탕>은 그의 거쳐 소개한 것처럼 마쓰가타에게 팔렸다. 그런데 이 판화는 마쓰가타가 파산했을 때 도쿄국립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고 중간에 다른 루트를 통해 리츠메이(立明館) 대학에 들어가 그곳 소장이 됐다.
도리 기요나가의 <욕탕>, 보스톤미술관
베베르는 마쓰가타에게 소장품을 양도한 뒤에 파리로 돌아와 다시 우키요에 판화를 모았다. 그 중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역시 기요나가의 <욕탕>이다. 이는 원래 하야시가 드가에게 증정한 것이다. 이때 드가는 자신의 그림 <아침 화장>을 답례로 주었다고 한다.
기요나가의 <욕탕>은 1917년 드가가 죽은 뒤 경매에 나오자 베베르가 이를 재차 손에 넣었다. 그후 이는 야마나카 상회를 거쳐 미국에 건너가 보스톤미술관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세상에서 기요나가의 <욕탕>으로 널리 알려진 판화는 이 보스톤 소장품이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많이 흘렀는데 다시 돌아오면, 빙 화랑에는 이들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출입했다. 파리에 와 있던 미국화가 제임스 휘슬러(James Whistler 1834~1903)와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무대배우인 사라 베르나르(Sara Bernardt 1844-1923)도 단골이었다. 사라는 위젠느 그라세도 가까웠다. 그가 그린 연극 포스터 에 사라 베르나르가 잔 다르크를 연기한 연극도 있었다.
또 프랑스 리모주의 도자기회사 사장이었던 미국인 찰스 에드워드 하빌랜드(Charles Edward Haviland 1839-1921)도 멤버였다. 그는 자포니즘이란 말을 만들어낸 평론가 필립 뷔르티의 사위이기도 했다.
방 오른쪽에 있는 장식장
지루 컬렉션은 드루오경매 이후 104년이나 지난 2008년 3월 또 한 번 열렸다. 파리 크리스티에서 열렸다. 이는 지로의 손자가 가지고 있던 조부의 컬렉션 510점을 경매에 낸 것이다.
이때 몇몇 중요한 유물은 경매에 앞서 장식미술관에 기증됐다. 그라세 식당 방 오르른쪽에 놓인 장식장과 식탁 테이블이 그것이다. 이렇게 이 위젠느 그라세의 식당 전시실에는 19세기말 파리에 살았던 부르주아들이 빠져들었던 동양의 자포니즘 취향이 그대로 재연돼 있다.
조셉-데오도르 데크의 나팔꽃문양 도자기
참고로 오른쪽 장식장 위쪽 벽에 걸리 파란 파이앙스 도자기는 당시의 도공이었던 조셉-데오도르 데크(Joseph-Théodore Deck 1823–1891)가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만든 나팔꽃 문양의 도자기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