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로 신혼여행 온 커플이 있다면 파리 다음으로 찾는 곳이 몽생미셀(le mont saint-michel) 섬이다. 노르망디 해안가에 있는 이 섬은 당일치기가 가능해 인기가 높다. 해안 바로 바깥에 떠있는 이 섬은 썰물일 때는 육지와 이어지는 이른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다. 모세의 기적도 신기하지만 정작 볼거리는 바위섬 전체에 세워져 있는 고색창연한 성이다. 현재도 일부가 수도원으로 쓰이고 있는데 여러 번 증축을 거듭하면서 완성까지 거의 8백년이 걸렸다.
이 성은 8세기에 노르망디의 한 주교가 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고 작은 예배당을 지은 데서 시작됐다. 그래서 이 성의 맨 꼭대기 첨탑 위에는 천사 미카엘의 황금 조각상이 올려져있다. 미카엘은 그리스도를 수호하는 일곱 천사 중 하나이다. 그는 용의 형상을 한 사탄을 물리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에서 용은 언제나 사탄으로 대신했다. 긴 창을 들고 용의 입을 찌르는 미카엘의 모습은 중세 때 수도 없이 많이 그려졌다.(서양에서 용의 급소는 심장이 아니라 입으로 여겼다) 그런데 사탄을 상징하는 용이 도처에 그려진 중국도자기들이 네덜란드를 통해 17세기부터 유럽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양이 든 도자기는 처음부터 엑조틱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에서 용은 고대부터 그 존재를 믿었고 따라서 종류도 많고 일화도 다양했다. 그리고 공예품 속에 들어와 송나라 때부터 왕권을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원 청화도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후 명청 시대가 되면 경덕진 관요에서는 왕실 전용으로 용문양이 든 도자기를 대량으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민간 가마에서는 용문양이 왕실의 최상급문화라고 여기며 이를 본뜨면서 발톱 수를 3개, 4개로 줄여 민간에서 쓰기 적당한 제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17세기 이후에 유럽에 들어온 용문 도자기는 전적으로 이런 발상에 근거한 민간 가마에서 만든 것들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런 용 문양을 보면서 전혀 왕이나 왕권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 이국의 엑조틱한 나라 중국만을 떠올렸다. 중국 도자기를 본떠 도자기를 만든 프랑스와 유럽 도자공방에서 사용된 용문양은 당시 시누와즈리를 대표하는 표상이었을 뿐이다.
백자청화 용문접시, 청 18세기 지름 50.5cm
유럽에서 일어난 그와 같은 이색 현상을 소개한 것이 17,18세기 전시실에 보이는 용문양 도자기 코너이다. 이 진열장의 선반 위쪽은 중국 본토의 것이고 아래쪽이 프랑스와 유럽에서 만든 용무늬 도자기들이 놓여있다. 본바닥 중국의 용 문양은 대형 접시에서 주전자, 병까지 다양하다. 개중에는 조각된 것도 있다. 유럽 모방품들은 상티이, 방센느, 생클루 같은 프랑스의 파리주변 가마뿐만 아니라 독일 마이센에서 구운 접시, 주전자, 찻잔까지 소개돼있다.
이 진열장 가운데 보이는 용 문양의 큰 접시는 청대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2-1735) 때 제작된 것이다. 접시 뒤쪽에 ‘대청옹정년제(大淸雍正年製)“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뒷면에 써있는 글귀를 관요명(官窯銘)이라 한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한 것으로 유명한 옹정제는 황실용 도자기 가마까지 직접 관리했다. 그는 높은 기술 수준을 요구하는 한편 청화기술이 뛰어났던 명나라 선덕(宣德 1426-1435)과 성화(成化 1447-1487) 때의 청화백자를 모방하게 했다. 이 접시는 그의 이와 같은 지시에 따라 만든 것이다.
접시 바닥에 정면을 바라보는 용이 자리 잡고 있다. 또 좌우에 이를 감싸듯 각각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 이 용 역시 색다른 점을 보인다. 마치 박쥐의 날개처럼 큰 귀를 펼치고 있다. 접시 맨 바깥쪽은 파도문양이다. 파도문양은 원나라 청화백자에 자주 보이는 보조 문양이다. 옹정제의 경덕진에서는 원의 고전을 모방했던 것이다.
건륭시절 만들어진 접시 뒷면의 선덕명
그 옆의 접시는 옹정제의 부친인 강희제 시대에 만든 것이다. 이 접시의 용문양은 조금 이색적이다. 파도치는 물결위에 용이 그려져 있고 한편에는 수염이 길게 난 잉어가 그려져 있다.
유리케이스 옆으로 돌아가 보면 이 접시의 뒷면을 볼 수 있다. 수장 레이블 사이로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라고 청화로 써 있다. 선덕은 명의 제5대 황제 주첨기(朱瞻基)의 연호이다. 재위는 불과 10년에 그쳤지만 이때의 청화백자는 앞선 3대 영락제(永樂 재위 1402-1424)때의 것과 함께 최고 수준으로 손꼽힌다.
이런 찬사는 영락제 때 이뤄진 정화(鄭和 1371-1433)의 대원정과 관계가 깊다. 쿤밍 출신인 정화는 이슬람교도였다. 12살 때 영락제의 환관이 되었다. 차츰 황제의 신임이 깊어졌고 마침내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대선단을 이끌고 7차례나 멀리 중동,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나가게 됐다. 이때 그는 이 지역 특산의 코발트를 손에 넣어 귀국했다.
중동산 코발트는 원이 멸망한 뒤 일시적으로 그 수입이 끊겼다. 대안으로 중국산 토청(土靑)을 쓰였다. 그런데 발색에 문제가 있어 명초에 만든 청화백자는 색이 흐렸다. 정화가 구해온 코발트(중국에는 이를 소마리청(蘇麻離靑)이라고 부른다)로 인해 다시 강렬한 푸른 색상을 되찾게 됐다. 이 소마리청에는 철분이 많아 구우면 청색이 군데군데 검게 뭉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접시에는 그런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선덕 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실은 강희제 때 만들었다. 강희제 역시 선덕 것을 모방해 만들라고 하면서 관요명까지 선덕이라고 써넣었다. 청대 도자기에는 이런 것, 방제품(倣製品)이 적지 않다. 그래서 중국도자기의 감식을 어렵게 만든다.
이들 청화접시 앞쪽에 백자 작은 병과 잔 그리고 주전자가 놓여있다. 이는 모두 복건성 덕화현의 덕화요(德化窯)에서 만든 것이다. 덕화요 백자는 우유 빛에 반투명해 마치 흰 대리석 같은 느낌이 특징이다.
이는 흙 때문이다. 덕화요 인근에서 나오는 자토(磁土)에는 철분이 적고 산화칼륨 성분이 높았다. 산화칼슘은 점성을 높여주는 특징이 있어 구워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잘 유지됐다. 이런 이점을 살려 만든 것이 덕화요의 현란한 조각이다.
백자 용조각 병, 청 17세기 높이 16cm
17세기 이후에 유럽 취향에 부합하며 덕화요 백자 역시 유럽에 많이 수출됐다. 옹정제 접시 앞쪽에 수구와 손잡이를 용으로 조각한 병도 이곳에서 만든 것이다. 이 접시의 왼쪽에 있는 사각 병은 일본에서 진사를 써서 용 문양을 넣어 구은 것이다.
용을 동양, 특히 중국을 가리키는 대표 상징으로 받아들였기 했지만 용 그 자체는 유럽에서 애초부터 친근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8세기 유럽의 시누와즈리 유행 뒷면에는 마치 금단의 독을 마시는 것 같은 짜릿한 일탈 취향도 공존했다고 할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