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파리가 사랑한 동양미술관
  • 최열의 그림읽기
  • 영화 속 미술관
  • 조은정의 세계미술관 산책
  • 미술사 속 숨은 이야기
  • 경성미술지도-1930년대
  •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조선의 글씨
  • 한국미술 명작스크랩
  • 도전! C여사의 한국미술 책읽기
  • 왕릉을 찾아서
  • 시의도-시와 그림
  •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타이틀
  • 5-2. 시누와즈리 양식의 다양한 유럽 도자기
  • 1947      

전 세계에서 도자기를 좋아하는 나라로 일본을 능가할 나라는 아마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도자기 애호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중국에서 건너온 도자기는 이미 무로마치(室町 1336-1571)시대 초기부터 보물로 여겼다. 한국 도자기에 대해서도 가히 한국사람 이상으로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도자기 애호의 나라에서 세계 도자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책이 쇼가쿠칸(小學館)에서 나온 『세계도자전집』이다. 이 책은 1979년에 1권을 나온 이래 마지막 권인 제23권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일본, 한국, 중국뿐만 아니다. 동남아시아도 다뤘고 중동과 서양도 빠짐없이 수록했다. 획기적인 기획이었던 만큼 전 세계의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총동원됐다. 한국에서는 정양모 전국립박물관장이 글을 썼다.

이 책의 20권에 올리버 임페이(Oliver Impey 1938-2005)가 쓴 「시누와즈리 양식의 도자기」란 논문이 들어있다. 시느와즈리(Chinoiserie)란 앞서 잠깐 소개한 대로 17,18세기 유럽의 가구, 직물, 정원, 도자기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유행한 중국 취향을 가리키는 프랑스 말이다. 임페이는 논문에서 당시 유럽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에 시느와즈리 현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유럽에서 중국도자기를 맨 처음 모방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델프트였다. 이곳에서 만든 것은 연질 백자 위에 코발트 안료로 푸른 문양을 그려 넣어 청화백자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는 半백자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델프트 자기가 얼마나 인기였는지를 말해주는 자료가 있다. 1649년만 해도 델프트에는 중국 문양이 든 연질자기를 만드는 곳은 서너 곳에 불과했으나 10년이 조금 지난 1661년에는 스무 집 이상으로 늘었다.

앞줄 화조문양 컵과 소서(왼쪽, 마이센 1730), 화조문양의 작은 사발(생클루 1730-1740)
뒷줄 화조문 작은 접시(왼쪽, 루앙 1725-1740), 중국인물문 접시(가운데, 델프트 1750-1775),
화조문양 사각접시(생클루 1720-1730)  

이런 인기 몰이는 델프트에 한하지 않고 유럽 각지에 전해졌다. 1709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마침내 ‘탱’하는 금속성 소리가 나는 백자 제작에 성공하자 마치 기름을 부은 듯이 더욱 확산됐다. 중국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청화백자를 만들게 된 드레스덴이 앉아서 큰돈을 버는 것을 본 것이다. 프랑스에서만도 느베르, 루앙, 생클루, 샹티이, 리모주 등지에 잇달아 도자공방이 생겨났다.

물론 프랑스는 네덜란드 델프트에서만 자극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내부적인 계기도 있었다. 프랑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무역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에 가 있던 프랑스출신의 예수회 수도사 조아장 부베(Joachim Bouvet 1656-1730)가 본국에 동양무역의 참가를 건의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강희제(재위 1661-1722)에게 대단한 신임을 얻고 있던 수도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건의로 1698년 바다의 여신이란 뜻의 앙피트리테 호가 광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배는 1700년에 강희제가 루이14세에 보내는 여러 예물과 함께 도자기, 비단을 싣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때 싣고 온 도자기는 정확한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160상자나 됐다고 한다.

이들 도자기는 네덜란드 배들이 실어온 수출용 도자기와 달리 황제의 하사품라는 점에서 극상품(極上品) 도자기들이었다. 이들이 비단 등 다른 물건과 함께 경매를 통해 팔리면서 프랑스 전역에 중국도자기에 대한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왼쪽부터 중국인물문 포도주그릇(생클루 1720-1730), 중국인물문 접시(루앙 1725-1740),
찜요리 포트(생클루 1720-1730)
 

일본의 중국도자기 전문가로 도쿄 네즈(根津)미술관 부관장을 지낸 니시다 히로코(西田宏子 1939년생)는 「청대의 수출 도자기」라는 논문에서 ‘이후 프랑스도 對중국교역에 관심을 가지며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총99척의 배가 광동을 왕복하면서 5백만 상자 이상의 도자기를 프랑스로 실어왔다’고 했다.

이들이 가져온 도자기들이 느베르, 루앙, 생클루, 샹티이, 리모주 등지에서 만드는 도자기에 영향을 미치며 결국 18세기 내내 프랑스 파이앙스 그리고 백자에 보이는 중국 취향의 바탕을 이루게 됐다. 임페이는 이런 시누와즈리 양식의 공통점으로 중국 복장을 한 인물들 그리고 명상 중인 신선  그외에 중국식 누각과 탑, 용, 우산 등의 요소를 꼽았다.  


3층 전시실의 자주색 10~18방이 17-18세기 전시실

3층의 14번방에서 16번방으로 이어진 복도의 유리 진열장안에는 당시 유럽에서 만들어진 시누와즈리 양식의 유럽 도자기를 망라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18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델프트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루앙, 생클루에서 만들어진 것에 모두 중국풍의 인물과 화조(花鳥) 문양이 그려져 있다. 물론 독일 마이센에서 만들어진 것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18세기는 이렇게 시누와즈리가 유럽의 도자기를 석권하고 있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7:13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