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가게들에 걸린 간판이 작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에투왈(별)을 받은 맛 집이래도 간판이 보일까 말까할 정도이다. 노란색 바탕에 뻘건 고딕글자를 큼직하게 써넣은 간판을 건물 앞뒤는 물론 창문마다 덕지덕지 붙인 한국과 같은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볼 레도 찾아볼 수 없다.
리볼리가에서 본 파리장식미술관 입구
미술관도 그렇다. 커다란 간판을 붙여놓은 곳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개인미술관은 더한데 길거리에 화살표가 그려진 손바닥만한 안내 표지가 고작인 경우도 많다.
파리의 장식미술관도 다르지 않다. 이층에서 내건 배너가 전부이다. 그렇다고 찾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파리 중심지인 리볼리가 107번지에 있어 건물로 보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루브르와 맞붙어있다. 리볼리가는 루브르의 세느강 쪽이 아닌 반대쪽 거리이름이다.
튈르리 공원 쪽에서 본 미술관의 야경
피라밋 광장에서 보면 루브르는 디귿 자로 돼 있다. 오른쪽이 드농관(세느강쪽)이고 왼쪽이 리슐리관(리볼리가쪽)이다.(뒤쪽은 슐리관이다) 제2제정의 나폴레옹3세 시절에 이 리슐리관에 이어서 마르샹관이 지어졌다. 장식 미술관은 이곳 마르샹관에 들어있다.
거리로 보자면 루브르와는 엎드리면 코 닿을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낙수 효과는 그다지 없어 보인다. 파리를 찾는 동양 관광객 가운데 이곳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에 들어가 보면 분명히 실감하게 된다. 그저 공예 작가나 디자인 전문가 정도가 드나들 뿐이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미술공예 산업을 위해서 1905년에 만들어졌다. 디자인은 나중에 추가됐다. 이곳은 프랑스의 19세기 산업정책의 하나로 설립됐다. 프랑스는 19세기후반 들어 열심히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만국박람회는 이미 소개한 대로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열렸다.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인 프랑스는 제2제정이 시작되자마자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박람회 시대를 열었다.
1855년의 첫 박람회에 이어 1867년, 1878년, 1889년 그리고 1900년 등 거의 10년 걸러 한 번 꼴로 열었다. 프랑스는 만국박람회를 처음부터 산업 육성과 상품견본 시장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장식미술관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설립됐다고 말할 수 있다.
애초에 지어진 마르상관은 파리장식미술조합이 사용했다. 그러다 1905년에 미술관으로 됐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여년에 걸친 대대적인 리뉴얼 공사를 마친 이후의 모습이다.
통천장으로 된 미술관 내부
리볼리가의 입구로 들어가면 지붕까지 뚫려있는 통천장이 눈길을 끈다. 통천장 아래에 양쪽으로 늘어선 회랑에 전시실이 있다. 소장품은 중세부터 현대까지 장식미술과 디자인에 관한 자료 15만점에 이른다. 프랑스 가구, 테이블 웨어, 태피스트리, 도자기, 유리, 그리고 중세 이후 현재까지의 장난감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평소 전시되는 것은 6천여 점 정도이다.
전시는 크게 다섯 파트로 나뉜다. 중세와 르네상스, 17-18세기, 19세기,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그리고 근현대 파트이다. 이 가운데 17-18세기의 전시실과 19세기 그리고 아르누보 전시실에 동양미술이 소개되어있다.
이곳에서 동양을 말해주는 소장품은 역시 대종은 도자기이다. 도자기는 16세기말에 처음 유럽에 전해졌고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가 그 무역을 독점했다는 것은 이미 소개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에 거점을 두고 중국 남부에서 실어온 중국도자기를 중계 무역했다.
이를 통해 유럽에 전해진 것이 명말(明末)의 청화백자였다. 흰 바탕에 푸른 문양이 든 청화백자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청결하게 보였다. 그 위에 무엇보다 튼튼했다. 유럽의 왕가, 귀족들 사이에 동양도자기 붐이 인 계기가 됐다는 것도 앞서 말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때 전해진 중국도자기는 오늘날 유명 미술관, 특히 일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일급은 아니었다. 즉 명이나 청의 궁정에서 사용을 전제로 관요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관요가 있는 경덕진(景德鎭)에서의 제조방식을 곁눈질하면서 보고 배운 주변의 민간가마에서 만든 것이다.
주변부를 구획해 각각 문양을 넣은 것이 특징인 크라크웨어
미국 토마스 루리 컬렉션의 크라크웨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가장 많이 전해진 청화자기를 유럽에서는 크라크웨어(Kraakware)라고 부른다. 이는 달리 크라크 포슬린(Kraak Porcelain)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화백자로 만든 커다란 접시를 가리킨다.
이 접시는 주변부를 여덟 혹은 열로 등분해 구획을 나눈 것이 특징이다. 접시 바닥에는 보통 사람이나 꽃과 새 같은 큰 문양이 그려져 있다. 주변의 구획에도 각각 화조 문양이 들어 가는게 보통이다. 크라크웨어를 가리키는 중국 쪽의 명칭은 따로 없다.
그렇지만 이 도자기는 17세기 후반, 즉 명나라 만력연간(1573-1620)부터 18세기 전반기, 즉 숭정 연간(1627-1644)까지 대량으로 제작됐다. 도자 교역사의 연구에 의하면 연간 수백만 점의 크라크웨어가 유럽에 수출됐다고 한다. 유럽에만 전해진 것이 아니다. 일부는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주변 장식이 연꽃잎을 닮았다고 해 후요데(芙蓉手)라고도 부른다.
속이 움푹한 클랩무트 청화백자
미국 토마스 루리 컬렉션의 클랩무트
크라크웨어 다음으로 많이 건너온 것이 클랩무트(Klapmut)였다. 이 역시 청화백자이다. 하지만 이는 기성품보다는 주문 제작품 쪽에 가깝다. 형태는 중국과 유럽에 공통인 접시가 아니라 큰 샐러드 볼에 가깝다. 굽이 넓고 깊이가 있어 국이나 수프를 담아 먹기 편하게 돼 있어 유럽에서 주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양은 크라크웨어와 마찬가지로 주변부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각각에 문양을 넣었다.
클랩무트라는 이름은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이 쓰던 사각형 모자에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크라크웨어라에 대해서는 애초에 이 도자기를 유럽에 가져온 포르투갈 범선을 가리키는 카라크(Carracks) 선(船)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클랩무트와 크라크웨어는 17세기 이후 수십만 점 이상 그려졌다는 네덜란드 정물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자기이기도 하다.
크라크웨어가 보이는 얀 데 헤엠의 정물화, 1672년경 네덜란드왕립컬렉션
크라크웨어나 클랩무트는 모두 네덜란드를 경유해 유럽에 전해진 때문에 암스텔담 레이크스미술관에 가장 많이 소장돼 있다. 하지만 장식미술관 3층의 17.18세기 파트에도 이들이 소개돼 있다. 특히 11번방에는 중국에서 만든 클랩무트가 당시 그려진 네덜란드 정물화와 함께 소개돼 있다.
반면 이곳에는 중국에서 만든 크라크웨어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11번방을 돌아 마주치는 진열장 안에 1670년에서 1690년 사이에 델프트에서 만든 크라크웨어가 있다. 물론 예의 중국 인물이 그려져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