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스의 미술품 수집은 사촌형 이삭의 권유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집안 내림이기도 하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모두 애호가이자 컬렉터였다. 큰아버지 베호르는 죽으면서 100여점의 유럽 회화와 상당수의 동양도자기를 남겼다. 아버지 니심 역시 60여점의 회화를 모았다.
현관 앞에 놓인 청화백자 천구병
이 미술관의 현관을 들어서서 처음 마주치는 소장품은 다름 아닌 중국도자기이다. 현관을 지키는 커다란 벽시계 아래에 둥글고 큰 청화백자 병 하나가 놓여있다. 이 병은 동그랗게 생겨 흔히 천구병(天球甁)이라고 불린다.
천구병은 명의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쓰이던 금속용기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곳에 있는 것은 청대에 들어 그것을 다시 재현한 것이다. 이 천구병은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장식돼 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곳의 동양도자기는 대부분 이처럼 모두 짝으로 장식돼 있다. 이는 원래 중국식 실내장식법의 하나였다. 그것이 18세기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에 들어왔다. 19세 후반이 되면 파리의 부르조아 집안에서도 중국 도자기라면 으레 이런 방식으로 디스플레이 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층계참의 청대 인물문 오채화병
층계참에도 목이 긴 화병 두 개가 놓여있다. 녹색을 많이 쓴 이른바 녹채 고사인물문 병이다. 이 역시 18세기 중국의 수출용도자기이다. 이 화병은 특히 그의 큰아버지 베호르가 소장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경매에 나온 것을 모이스가 다시 구입했다.
화병을 올려놓은 장식장은 173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루이15세의 가구를 제작한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 가구장인 베르나르트 2세 판 리센 뷔르흐(Bernard Ⅱ Van Risen Burgh 1700-1760)가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여러 자재를 써서 고급의 소품 장식장을 짜는 소목장을 에베니스트(ébéniste)라고 불렀다. 같은 소목장이기는 해도 의자나 테이블처럼 서민용의 평범한 가구를 짜는 사람은 므뉘시에(menuisier)이라고 해서 이들과 구분했다. 베르나르트 2세가 짠 장식장에는 당시 수입되던 일본의 칠기판이 사용돼있다.
계단을 올라 처음 마주하는 방은 그랑 뷔로로 모이스가 재택 사무실로 쓰던 서재이다. 이 방부터 18세기 프랑스 왕가와 귀족들의 가구, 장식품으로 이뤄진 그의 컬렉션을 본격적으로 전시돼있다.
그랑 뷔로 모습
이 방에 있는 의자는 루이15, 16세 시대의 궁중에서 활동한 에베니스트들이 만들었다. 쿠션이 있는 안락의자 2개는 1790년에 클로드 쉬비니(Claude Chebigny 미상)의 제작이고 푸른색 커버를 씌운 팔걸이 없는 의자 2개는 장 밥티트스-클로드 스네(Jean-Baptiste-Claude Sené 1748-1803)가 1769년에 만든 것이다.
또 전기스탠드가 올려져있는 둥근 다용도 테이블은 샤를 토피노(Charle Topino 1735-?)가 1775년에 만들었다. 이 테이블의 아래쪽에는 중국 산수화(山水畵)가 상감(象嵌)으로 세공돼 있으며 대리석 윗판은 브레흐 달렙(Brèche d'Alep 미상)이라는 대리석 장인이 만든 것이다.
이들 가구를 만든 장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찍부터 이들의 작업분야가 전문화된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 가구 아래쪽에 직접 서명을 남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팔걸이 없는 파란 천 의자의 아래에는 마치 동양화의 낙관 같은 글이 적혀있다.
즉 ‘장 밥티트스-클로드 스네’라는 이름과 함께 ‘몽트뢰에서 마담 엘리자베트를 위해 제작하다. no.89'라는 글귀가 있다. 이런 제작 실명제로 인해 요즘도 이들이 만든 가구는 오늘날의 세계경매시장에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스타일만을 전문으로 수리하는 장인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가구 뒤로 보이는 커다란 태피스트리 역시 18세기 제작품이다. 당시 태피스트리 공방으로 유명한 오뷔송(Aubusson) 공방에서 만들었다. 오뷔송은 프랑스 중부 리모주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17세기부터 태피스트리와 카펫을 만드는 왕실제작소가 있었다.
우드리 밑그림의 오뷔송 테피스트리(퐁텐블로 우화의 한 장면)
그림은 퐁텐블로의 우화를 소재로 한 것이다. 밑그림은 당시 유명화가였던 장-밥티스트 우드리(Jean-Baptiste Oudry 1686-1755)가 그렸다. 우드리는 샤낭개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회화관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그의 그림이 소장돼 있다.
모이스는 이와 같은 절대왕정 시대의 가구와 장식미술품을 대개 파리의 화랑을 통해 구입했다. 이들 화랑 중에서 가장 오래 거래한 곳이 셀리그만 화랑이다. 이는 독일 태생인 자크 셀리그만(Jacque Seligmann 1858-1923)이 1880년 파리에 와 시작한 곳이다.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장식미술과 18세기 프랑스 장식미술을 전문으로 다뤘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그는 1900년에 가게를 파리 한복판인 방돔 광장으로 이사했다. 모이스가 이 집을 찾은 것은 부인 이렌느와의 이혼소동이 한창이던 1890년대 후반이다. 그후 40년 넘게 드나들었다. 어느 한 해에는 90만 프랑 어치의 물건을 산 적도 있었다.
셀리그만은 1904년에 뉴욕에 지점을 내고 미국의 여러 미술관과도 거래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18세기 프랑스가구 컬렉션에는 셀리그만이 구입처로 기록된 것이 상당수 있다. 장식 가구뿐만 아니라 인상파와 근대미술도 다뤘다.
[참고] 피카소, 아비뇽의 세 여인
뉴욕 거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세 여인>을 다룬 일이다. <아비뇽의 세 여인>은 피카소가 맨처음으로 큐비즘 화풍을 선보인 그림으로서 미술사 책이라면 빼놓지 않고 소개하는 그림이다. 이는 원래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시대의 파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였던 자크 뒤세(Jacques Doucet 1853-1929) 소장품이었다. 그가 죽은 뒤 시장에 나오자 셀리그만이 손에 넣었다.
그리고 뉴욕으로 가져가 미국의 동업자 세자르 데 하우케(César De Hauke 1900-1965)와 함께 피카소 전시를 열었다. 이때 이를 보고 뉴욕 근대미술관(MoMA)이 탐을 내 구입하게 됐다. 이때가 1937년이다. <아비뇽의 세 여인>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뉴욕 근대미술관을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이다.
이 방의 벽난로 위에 있는 청화백자화병은 18세기에 유럽에 수출된 중국도자기이다. 구입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에 수입된 뒤 1780년에서 90년 사이에 청동 받침과 금박이 입혀졌다고 설명돼있다. 앞쪽 테이블에 놓인 화병도 18세기 제작의 중국도자기이다.
이솝우화 소재로 한 사본르리 공방의 병풍
복도 쪽에 칸막이처럼 세워져 있는 6곡 양면병풍은 1735년에서 40년 사이에 왕실 카펫제작소가 있던 사본느리(Savonnerie) 공방에서 만든 것이다. 양면 모두에 화조가 수놓아져 있는 가운데 맨 마지막 폭에는 원숭이가 악기를 연주하고 줄타기를 하는 생주리가 그려져 있다. 생주리는 18세기 일반 귀족뿐만 아니라 궁정에서도 이국적 취향을 대표하는 그림 소재의 하나였던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