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누치가 동양 여행에서 구입한 것 가운데 절반이 넘는 3,500점이 일본 미술품이었다. 이 중에는 부피가 커서 파리까지 가져오는데 애를 먹은 것들도 있었다. 에도시대 후기에 그려진 거대한 열반도와 ‘위대한 여래 홀(the great buddha hall)’에 모셔져 있는 18세기의 아미타여래 좌상도 그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앉은 키만 4미터40센티미터에 이른다.
위대한 여래 홀의 에도시대 아미타여래 좌상
여래상은 중국 불상이 전시돼있는 2층 메자닌에서 앞쪽으로 돌출돼 있는 테라스에 안치돼 있다. 그래서 아래층에서 올려다보면 허공에 떠있는 듯해 한층 신비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이 불상은 원래 도쿄 메구로(目黑)의 반류지(蟠龍寺)에 모셔져 있었다. 현재도 남아있는 이 절은 세르누치와 뒤레가 일본을 방문하기 얼마 전에 큰 불이 났다. 여러 채의 건물이 불에 타면서 큰 피해를 보았으나 당시는 재건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무렵 일본 사찰은 상당수가 존폐 기로에 처해있었다.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거의 모든 사찰은 대개 비슷하게 재정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다. 메이지 정부는 국가신도제(國家神道制)를 도입하면서 이른바 신불(神佛)분리령을 내렸다. 예부터 사찰에서 신도의 신을 부처님과 함께 모시던 관습을 법률로 금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각 사찰은 막번 체제의 해체로 인해 다이묘(大名)들의 후원이 끊겨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도 신자들로부터의 공양도 끊기게 됐다.
세르누치가 얼마를 주고 이를 구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크기가 너무 커서 900여 조각으로 분리해 파리로 실어왔다. 파리에서는 훗날 로댕 전속으로 일을 했던 발레디엔이란 주물공이 이를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전한다.
아미타불 앞에서 열린 그의 영결식장 모습(1896년)
세르누치는 이 불상을 더없이 아꼈다. 그가 죽은 뒤 영결식이 이 불상 앞에서 치러졌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는 종교적으로 불교를 믿지는 않았다. 그는 불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뒤레는 여행기에서 세르누치의 불교에 대해 그는 불교를 철학의 하나로 여기며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평등하게 대하는 철학 체계라고 인식했다고 적었다.
이 거대한 불상을 파리에 가져왔을 때 큰 화제가 됐다. 친구 졸라는 이 홀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 어디선가 구한 스님 옷을 입고 왔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세르누치는 짧은 여행기간 동안 수천 점을 구입한 大컬렉터였지만 심미안이 탁월하거나 미술사적 조예는 깊지 않았다. 그는 성격적으로 순수하고 진정성이 있었다. 자신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쪽이었다. 이는 미술품 구입에서 종종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뒤레는 큰돈을 주고 산 것 가운데 가짜가 더러 있었다고 했다. 또 의심스러운 물건을 산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 일본에 앞서 인도네시아 자바를 들렀을 때 그곳에서는 네덜란드인 사진사 이시도르 반 킨스베르겐(Isidore Van Kinsberge으n 1821-1905)의 가이드를 받았다. 그는 자바의 민속과 보르부드르 사원을 찍어 사진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일부 유물을 빼돌려 팔았다는 비난도 받았다. 세르누치가 산 작은 인도네시아 불상도 실은 그가 빼돌린 것이었다.
그가 동양 여행을 나섰을 때 파리는 동양에 대한 관심에 이어 동양미술 수집 붐이 일고 있었다.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는 1855년에 처음 열렸다. 그러나 실은 이는 급조된 행사였다. 이보다 앞서 1851년에 런던에서 제1회 만국박람회가 열리자 매사에 영국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를 만회하기 위해 서둘러 준비한 것이 1855년의 만국박람회였다.
따라서 1867년의 만국박람회는 두 번째에 해당하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실질적 첫 번째 만국박람회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2제정은 영국 못지 않은 제국의 위신을 과시하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 박람회의 준비와 성공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이때 동양에서 일본이 처음으로 정식 참가했다. 하지만 때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일본 대표에 혼선이 있었다. 권위가 추락중인 에도 막부만이 일본 대표가 아니었다. 사쓰마 번과 사가 번도 지방정부 이름으로 각각 초대됐다.
사쓰마 번은 ‘일본 사쓰마 류큐국 태수정부’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류큐, 즉 오키나와는 1609년 이래 사쓰마 번의 속국이 돼 있었다. 대표성의 복잡한 문제와는 별개로 이들 일본 중앙과 지방정부의 참가로 인해 파리에는 동양 붐이 크게 고양됐다.
이 무렵에는 동양 붐과 연관해 동양미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1860년에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이 계기가 됐다.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파병된 영불 양국의 연합군은 베이징까지 진격해 인근의 이궁(離宮) 원명원(圓明園)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전리품 획득이란 측면에서 약탈이 조직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약탈 전리품들이 박람회 이전에 이미 유럽으로 건너와 시장에 나돌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국 고대청동기 전시 모습
원명원에서 유출된 물건들은 중국 황실에서 사용하고 소장하던 최고급 미술공예품들이었다. 이들의 정교한 세공과 솜씨는 수출용 중국도자기 정도만을 보아온 유럽인들을 즉각 매료시켰다. 원명원 약탈품의 일부는 황제에게 진상되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위제니 황후(Empress Eugénie 1826-1920)은 진상품 외에 시장에 나도는 물건들을 수집해 자신이 살고 있던 퐁텐블로 성에 중국미술관을 꾸미기도 했다.
원명원 약탈품은 유럽에 건너간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르누치가 중국을 여행할 무렵 북경 시장에는 약탈한 군인들이 처분하고 간 물건들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 근대골동시장의 성립을 제2차 아편전쟁 이후부터라고 말할 정도이다. 세르누치는 중국 여행에서 청 황실에서 유출된 청동기와 옥기를 다수 수집했다.
세르누치가 베이징에서 구입한 서주시대의 청동제기 뢰, 높이 49.7cm
이때 수집한 청동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뢰(罍)이다. 뢰는 제기의 하나로 서주 시대(BC1050-BC771)에 제사를 올리면서 술항아리로 썼던 것이다. 몸체에 상상의 괴수인 도철문(饕餮文)이 새겨져 있고 양 옆에 짐승 형상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뚜껑도 뿔이 있는 괴수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당당한 크기는 이런 종류의 청동제기 가운데 대표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르누치 컬렉션이 유럽에서 동양미술 전문미술관으로서 권위를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유럽 어느 미술관보다 고대 중국청동기를 충실히 갖췄다는 점에 있기도 하다. 중국 고대청동기는 그의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 추가됐다.
사후 컬렉션 가운데 세르누치의 얼굴로 손꼽히는 청동기가 있다. 1920년에 구입한 상(商) 시대(BC1550-BC1050)의 유(卣)이다. 유 역시 제기의 하나로 술을 데우는 데 썼던 것이다. 유의 형태는 여럿이지만 세르누치의 유는 지금까지 알려진 중국 고대청동기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상나라 시대의 청동제기 호유(虎卣), 높이 36.2cm 1920년 구입
이 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번에 고대의 주술 세계를 마주친 것 같은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호랑이처럼 보이는 짐승이 큰 입을 벌리고 어린아이를 금시라도 잡아먹을 듯한 형상으로 조각돼 있다. 짐승의 가슴에 안겨있는 아이는 거의 무표정에 가깝다.
불가사의한 이 조각상의 해석을 두고 오래 동안 의견이 엇갈렸으나 근래에는 식인호(食人虎)라는 해석을 버리고 어린아이를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품어서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됐다. <호유>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여졌다.
동물형상 청동기 가운데 최상의 솜씨를 보여주는 이 <호유>는 전 세계에 또 하나가 있다. 중국이 아닌 일본으로서 교토의 센오쿠학코칸(泉屋博古館)이 하나가 소장돼 있다. 이는 스미토모그룹 발전의 초석을 다져놓은 스미토모 집안의 제15대 당주 스미토모 슌스이(住友春翠 1865-1926)가 당시 베이징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을 통해 1903년에 구입한 것이다. 역시 출처는 미상이다.
일본에서 청 황실유물의 유전(流轉)의 역사를 연구한 일본의 도미타 노보루(富田昇)에 따르면 세르누치에 있는 <호유>는 베이징 국자감 좨주를 지낸 성욱(盛昱 1850—1899)의 구장품이라고 한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 미술품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유출될 때 그의 소장품도 흘러나왔는데 이 호유 역시 그 무렵 유럽으로 건너간 것으로 전한다.(y)
*도미타 노보루(富田昇) 『유전청조비보(流傳淸朝秘宝)』 NHK출판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