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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몽소공원 옆 고급주택가의 저택미술관
  • 1784      


세루누치 외관


파리는 공원이 많은 도시이다. 파리 동쪽과 서쪽에 각각 방센느 공원과 볼로뉴 공원이 있다. 이들의 엄청난 규모를 보면 공원 보다는 방센느 숲, 볼로뉴 숲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파리는 이 숲 외에 시내 곳곳에 동네 쉼터 같은 작은 공원들이 있다. 숲과 동네 공원 사이쯤 돼 규모도 제법 되면서 유명한 곳이 남쪽의 룩상부르 공원과 북쪽의 몽소 공원이다. 룩상부르 공원은 파리 소르본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있다. 네모반듯하고 어디서 봐도 좌우 대칭으로 보이는 기하학적인 조영이 특징이다. 그에 비하면 몽쏘 공원은 보다 자연적이고 전원풍이다.

몽소 공원은 18세기 후반 루이-필립 오를레앙 공(Louis-Philippe d’Orléans 1743-1793)의 정원이었다. 그는 루이-필립 왕의 아버지이며, 샹티이 성의 마지막 성주였던 오말 공의 할아버지이다. 자유사상을 지지하고 혁명에 호의적이었으나 아이러니컬하게 혁명의 와중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재산은 국유화됐다.
 
왕정이 복고된 뒤에 그의 재산은 반환됐으나 제2제정(1852-1870) 시절 파리시가 대규모 개조사업을 벌이면서 그 일부가 매각돼 공원이 됐다. 몽소 공원의 탄생은 이때 이뤄졌다. 그리고 나머지 부지는 금융업자였던 에밀과 이삭 페레르 형제(Émile Péreire 1800-1875, Isaac Péreire 1806-1880)에게 팔렸다. 두 형제는 이곳을 신흥 고급주택지로 개발했다. 오늘날 공원 주변에 즐비한 고급주택은 그 무렵부터 지어졌다. 



세르누치 흉상

몽소 공원의 서쪽 출입구 중 하나인 벨라스케스 거리 7번지에 세르누치 미술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세르누치 미술관은 고급 저택을 개조해 만든 이른바 저택 미술관이다. 그래서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유럽에서는 대여섯번째로 손꼽히는 동양미술 전문미술관이다.

세르누치는 설립자 이름이다. 세르누치는 프랑스인의 성(姓)치고는 이색적으로 들리는데 실제 그는 귀화한 이탈리아이다. 본명은 앙리코 세르누치(Enrico Cernuschi 1821-1896). 프랑스 이름은 앙리(Henri)이다.

원래는 밀라노 출신으로 변호사였다. 그러다 이탈리아혁명 운동이 뛰어들어 투옥됐다. 풀려난 뒤에 고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해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그는 이탈리어 교사, 필경사 같은 허드레 일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한편 경제학과 금융을 공부했다.
 
이후에 직장다운 직장에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페레르 형제가 세운 부동산 전문은행이었다. 그는 여기서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며 이사까지 올랐다. 이어 파리 금융계에 두각을 나타냈고 그로 인해 독립한 뒤에는 파리의 은행가들과 공동으로 은행까지 설립했다. 그가 설립한 파리 은행은 나중에 네덜란드 은행과의 합병 등을 거쳐 오늘날 BNP 파리바 은행이 됐다.
 
이렇게 은행가로 활동하며 그는 엄청난 부를 쌓았다. 미술관 설립은 제2제정이 무너진 뒤 은행업에 손을 떼고 난 뒤의 일이다. 혁명에 관여한 것처럼 그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다. 은행 일에서 손을 뗄 무렵 수중에 200만 프랑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가지고 신문사를 사들였다. 그리고 독재로 치닫는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을 공격했다. 마침내 제정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섰을 때 그는 선포식에까지 초대 받았다. 프랑스로 귀화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어 파리 코뮨(1871년 3월18-5월28일)이 일어났다. 이때 신문사 편집장으로 함께 일하던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파리를 떠날 결심을 했다. 이때 화가인 친구 데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 1838-1927)와 함께 세계 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이 미술관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동행한 뒤레는 글이 가능했던 화가로 그림을 그리는 한편 미술평론 활동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친했고 화가는 마네, 쿠르베 등과 가까웠다. 1874년 인상파 전시에 대해 혹평이 쏟아졌을 때 그가 발 벗고 나서 이들을 옹호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미술관 입구의 일본 청동향로와 청동 화병

두 사람의 여행은 1871년9월부터 1873년1월까지 약1년 반이 걸렸다. 인도, 세일론, 자바, 몽골 그리고 중국의 북경, 남경, 상해, 항주, 홍콩을 거쳐 일본까지 갔다. 이 여행에서 그는 단지 동양을 구경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양의 철학에도 깊이 매료됐다. 불교도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서 접하며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이 여행에서 중국과 일본의 미술품 약5천점을 구입했다.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파리 부르주아들 사이에는 한창 동양 관심이 한창 높아지던 시절이었다. 그가 방대한 양의 동양 미술품을 수집해 왔다는 사실은 파리 사교계에 큰 화제가 됐다. 1873년 가을 빈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자 파리에서도 산업궁에 동양미술 특별전을 열었다. 이때 그의 수집품이 초청돼 크게 눈길을 끌었다. 파리 산업궁은 1855년 제1회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이후 1897년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1900년의 만국박람회장이 된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가 들어섰다.  


다빈치 초상이 그려진 메다이용
 

귀국 이후 그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택한 곳이 몽쏘공원 앞의 벨라스케스가 7번지였다. 페레르 형제가 분양한 땅을 구입해 처음부터 소장품 전시를 염두에 둔 집을 지었다. 현관 위에는 자신이 숭배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천재예술가 다빈치의 초상을 걸어놓았다. 이탈리아 풍으로 지어진 그의 집은 당시 ‘세르누치 궁’으로 불렸다. 이곳에는 모네와 르노와르도 찾아와 그의 동양 수집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세르누치 미술관이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이다. 그는 죽으면서 저택과 소장품 전부를 파리시에 기증했다. 이로서 1896년10월 미술관이 오픈했다. 오늘날의 미술관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대대적인 리뉴얼 공사를 마치고 2005년 재개관한 모습이다.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의 도자기 대병

1층은 회화전시실로 상설전은 물론 아시아 화가들의 초대전이 주로 열린다. 세르누치가 수집한 컬렉션과 그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기증된 동양 미술품은 주로 2층에 전시돼 있다.

전시는 2층으로 올라가는 현관 왼쪽의 작은 홀부터 시작된다. 이곳에 화려한 용조각의 청동 향로와 대형 칠보화병 2개가 있다. 또 계단 양쪽에 사람 키 높이만큼 큰 청화백자 항아리도 놓여 있다. 모두 일본 것들이다. 

청동 향로는 만국박람회 시대에 유럽에 청동조각을 만들어 수출했던 기무라 도운(木村渡雲)이 만든 것이다. 청화 화병은 세토(瀨戶) 도자기로 역시 일본 여행에서 구입한 것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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