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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 동양실의 왕자 금사리 운용문청화백자
  • 2501      


세브르의 동양도자실은 1층 동쪽 끝에서 두 번째 방에 위치해 있다. 동양도자의 오랜 역사에 비하면 방 규모가 작아 동양에서 온 관람객은 적잖이 실망하게 된다. 이 방에 한중일(韓中日) 도자기가 함께 전시돼있다.
그중에서도 한국 도자기는 전시 면적으로 보면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적게 보인다. 직사각형 방의 긴 쪽 벽은 각각 중국과 일본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입구와 마주보이는 짧은 벽면 한 쪽이 전부이다.

중국과 일본 도자기가 16,7세기부터 유럽에 알려진 사정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한국 관람객은 이 방에서 전혀 기죽을 필요가 없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방의 주인이 한국도자기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방 한가운데 있는 특별 진열장에는 커다란 용문양이 그려진 청화백자 하나가 떡 하니 자라잡고 있다. 우람하고 당당한 자태는 옆에 있는 원나라 대형 청화백자 접시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이 백자청화 운용문 항아리는 시대로 보면 그리 오래지 않는다. 18세기에 만들어졌다. 중국 코너에 있는 송, 원대 도자기에 비하면 훨씬 후대이다. 그러나 특별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은 충분하다.



백자청화 운룡문 항아리 1894년 플랑시 기증

우선 당당하다. 높이가 무려 60.2cm이 이른다. 근세 이전에 이만한 크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이고 일본이고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했다. 그 위에 구름 속에 노니는 용 그림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세브르의 평이 후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 있더라도 당연한 대접받을 만하다.

이는 뛰어난 자기가 많이 나온 18세기 금사리 가마 중에서도 최고급 수준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18세기 금사리에서 만들어진 백자청화 운용문 항아리는 현재 10여점이 전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큰 것은 유례가 없다.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유명한 항아리조차도 높이가 56.2cm에 불과하다. 

이런 명품은 세브르가 한 외교관을 통해 기증받았다. 그는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로 1886년 조불(朝佛)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한국에 온첫 번째 주한공사였다. 그는 이후에도 또다시 파견돼 햇수로 치면 모두 13년 동안 서울에 체류했다. 그에 대해서는 조선궁녀 이심과의 로맨스도 유명한데 그는 외교관이면서 한편으로 컬렉터였다. 조선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가 부임했던 일본과 모로코에서도 많은 자료, 미술품을 수집했다.

조선에서의 수집은 도자기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비중으로 보면 고서(古書) 수집이 더 컸다. 1890년 통역으로 서울에 파견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은 그의 체계적인 서적 수집을 도운 사람의 하나이다. 쿠랑은 나중에 이 자료를 가지고 4권으로 된 『한국서지』라는 책을 써 유명해졌다. 이 항아리가 그가 모은 도자기 중 대표격이라면 책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이다.

그는 이렇게 모은 조선의 책과 자료를 프랑스로 돌아가 각각 프랑스국립도서관과 동양어대학 도서관에 나누어 기증했다. 그리고 260여점 가까운 도자기는 세브르에 기증했다. 전시 자료에는 이 항아리가 1894년에 기증된 것으로 돼있다.

그의 첫 번째 서울 근무는 1887년에서 1890년까지였다. 이를 고려하면 이 운용문 항아리는 첫 번째 파견 때 수집했고 그리고 파리로 돌아와 바로 기증한 것이 된다.(두번째 파견은 1896년에서 1906년까지로 이때 제3대 주한공사를 지냈다)

콜렝은 이에 앞서 서도 도자기를 기증했다. 그렇지만 세브르 전체로 보면 플랑시 공사가 세브르에 처음 조선도자기를 기증한 사람은 아니다. 세브르에 조선도자기가 들어온 것은 생각보다 이르다. 1851년이 처음이다. 중국에 외교관으로 나갔던 샤를 드 몽티니(Charles de Montigny 1805-1868)가 중국에서 구입한 조선 도자기를 기증한게 최초이다. 

그는 1848년부터 1853년까지 상하이 공사를 지냈다. 이때 조선도자기 두 점을 구해 가지고 와 세브르에 기증했다. 구입처가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데 2점 모두 석간주 병이다. 석간주는 거친 백자 흙에 철분이 많이 든 유약을 발라 구운 자기를 말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보통 사람들의 일상 용기로 많이 쓰였다.  



백자장군 높이35.4cm 1878년 빌켕 기증

그후 베이징의 중국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아나톨 아드리앙 빌켕(Anatole Adrien Billequin 1836-1894)이 기증한 것이 두번째였다. 그는 1877년에 7점의 조선도자기를 세브르에 기증했다. 모두 베이징에서 샀다고 했다. 그 중 가장 비싼 것이 16프랑을 주고 산 백자 장군이다. 나머지는 모 2, 3프랑 정도를 주고 산 것들로 지방가마에서 만든 조악한 백자들이다.
 
그리고 나서 플랑시가 기증하기 전까지 중요한 기증이 한 번 더 있었다. 플랑시는 처음 조선에 부임하면서 고종을 알현할 때 프랑스 측의 예물을 헌상했다. 이때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로 몇 가지 물건을 하사해 프랑스 정부에 보내게 했다.
  
플랑시 공사시절의 프랑스 대통령은 제5대 사디 카르노(Sadi Carnot 1837-1894)였다. 그는 새로 외교 관계를 맺은 조선 국왕에게 세브르국립도자제작소에서 만든 화병 3점을 선물했다. 황동 손잡이가 달려있고 몸체에 조각이 새겨진 클로디옹 병(la vase Clodion) 2점과 손잡이 없이 몸체에 그림이 그린 살라딘 병(la vase de Salamine) 하나였다.(세브르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현재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청자양각모란당초문 대접 지름19cm 1889년 카르노 대통령기증 

이에 대해 고종이 답례로 하사한 것이 고려청자 완 2점이었다. 하나는 음각으로 봉황새가 새겨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각으로 모란당초문을 찍은 것이다. 음각 봉황문 대접은 언제 파손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입 주위 일부가 떨어져 나간 채 전한다. 다른 하나인 청자양각 모란문 접시는 지름이 19cm나 되는 큰 것이다. 고종 당시의 한양은 일본인 컬렉터, 상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고려 청자를 찾고 있을 때였다.
 
세브르에는 이들 기증품 이외에도 플랑시 공사시절 조선을 방문했던 민속지학자 샤를 바라(Charle Varat 1843-1893)가 기증한 약간의 조선 말기의 백자가 더 있다. 세브르의 한국도자기는 이들 기증품을 중심으로 40여점이 상설 전시돼 있다.



[참고] 세브르에서 플랑시 기증품을 모방해 만든 화병 <서울> 1902년

세브르에서는 이렇게 기증 받은 한국도자기를 가지고 유약과 형태를 재현한 작업도 한 적이 있다. 플랑시가 기증한 목이 짧고 입이 벌어진 이른 석간주 광구병(廣口甁)의 형태를 빌어 세르브 개발의 유약을 입힌 병은 1902년도 만들어졌고 또 1924년에도 제작됐다. <서울> <울산> 등의 이름이 붙여진 이 화병은 2014년 콜랭 드 플랑시의 업적을 기리며 열린 특별전(Roman d'un Voyageur)에 소개되기도 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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