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르의 일본도자기는 평소 프랑스가 보인 일본사랑(?)에 비하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한중일을 한꺼번에 소개한 방의 한쪽 벽면뿐이다. 소개는 한국과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별로 진열돼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길을 끄는 점은 세계 어느 곳의 도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일본에만 존재하는 다도구(茶道具)라는 특별한 세계가 별도로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긴란데 중에서 이처럼 바깥쪽에 칸을 나눠 문양을 채운 것을 후요데(芙蓉手)라고 한다.
무채색의 다도구 세계는 뒤에 돌리고 우선 시대순부터보면 일본의 도자기는 17세기 초까지 평범하기 그지없다. 고려시대에 에메랄드 색의 청자를 만들고 있을 때 일본은 여전히 한국의 삼국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도기의 시대였다.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에도 여전히 도기를 구웠는데 이런 일본이 자기 시대로 단숨에 도약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임진왜란이 계기가 됐다.
끌려간 수 백 명의 도공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삼평(李參平)은 큐슈 아리타(有田)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백토를 찾아냈다. 이삼평은 근처인 덴구다니(天狗谷)에 가마를 만들고 백자를 굽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최초의 백자이다. 이로 이삼평은 일본에서 도조(陶祖)로 불리며 아리타는 일본 자기의 본고장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삼평과 그가 이끈 조선도공들이 처음에 만든 것은 조선 청화백자의 카피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행운이 찾아왔다.
1680년경 제작된 이마리 오채 합
명청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중국 도공들이 건너온 것이다. 이들은 조선 도공이 끝내 개발하지 못했던 새 기술을 일본에 전수해주었다. 명나라에서 개발된 오채(五彩) 기법이다. 이를 받아들여 만든 도자기는 명청 혼란기에 새로운 도자 공급처를 찾던 네덜란드 상인의 눈에 띠면서 수출 상품으로 급부상했다. 유럽에서의 일본 도자기가 알려진 것은 17세기 중반 무렵으로 일본은 물론 유럽에서도 이들 수출용 도자기를 이마리(伊万里)자기라고 불렀다. 이마리는 아리타 자기를 수출하던 수출항의 이름이다.
아리타 도공들은 이후 무역상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다양한 기술과 문양 개발에 노력을 경주했다. 명나라의 수출자기를 곁눈질하면서 카피로 시작했지만 이내 일본적 감성을 도자기에 반영시키는데 성공했다. 여백을 많이 살린 간결한 문양은 이를 대표하는 특징의 하나이다. 여백이 많이 두고, 문양을 그리더라도 새나 대나무 등과 같은 간결한 소재를 산뜻하게 그린 가키에몬(柿右衛門) 자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됐다.
그리고 오채 자기에 금박을 한 번 더 입힌 이른바 금채(金彩) 자기도 개발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긴란테(金襴手)라고 부른다. 유럽에 수출된 일본자기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이 바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긴란데였다.
앞쪽 청화백자는 초기의 것이며 뒤쪽에 기하학 문양이 든 것이 나베시마 자기이다.
그 외에 구마모토번 직영가마에서 구은 나베시마(鍋島) 자기도 있다. 이 자기에는 꽃이나 기하학적 문양이 충분한 여백과 함께 단정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세브르의 일본 컬렉션은 이런 일본도자의 흐름을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완, 차 주전자, 물 그릇 등으로 이뤄진 일본의 다도구는 세계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수한 도자기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이 됐건 서양이 됐건 혹은 중동이 됐더라도 자기나 도기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실용과 장식 모두가 예외 없이 정형의 형태를 원한다. 네모라면 꼭 네모가 나야 하고 둥글면 반드시 원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야 완성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일본 다도의 세계에서는 찌그러지고 일그러져도 그 자체로 완성된 것으로 여긴다. 그 점에 대해 세브르에서도 다도구 해설 패널을 비치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다도의 차 스승들은 의식 진행과 그에 사용되는 다도구에 관한 규칙을 정했다. 그것은 와비, 사비 그리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간소함의 미학이다. 이후 차를 즐기는 사람들은 가마 속에서 우연히 생긴 간단한 문양과 장식 기미가 없는 불완전한 모습을 높이 평가했다.”
와비는 부족한 가운데 만족을 찾는 것을 가리킨다. 사비는 원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락하는 것을 가키지만 다도에서는 한적하고 조용한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기분을 말한다. 이 둘은 모두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에서 한 걸음 벗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인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동양적 신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도구 코너를 별도로 마련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차를 담는 차이레(茶入)에서 물그릇인 미즈사시(水脂) 그리고 다완까지 40여점이 종류대로 소개돼 있다. 그중 절반 가까이에 하야시 다다마사(林忠正 1853-1906)의 기증이다.
파리의 고미술상 하야시 다다마사가 기증한 다완들
하야시 다다마사는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유럽, 특히 프랑스의 자포니즘(Japonisme)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자포니즘은 19세기 말에 일었던 일본 취향 내지는 취미를 가리킨다.
그의 본업은 골동상이었다. 도야마(富山)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도쿄에 올라와 불어를 배웠다. 일본 메이지정부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할 때 통역 자격으로 파리에 왔다. 당시 25살로 소속은 기류(企立)공상회사였다. 이 회사는 그보다 앞서 1874년에 일본이 빈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미술 공예품을 팔기 위해 급조한 국책 무역회사이다.
당시 파리는 일본 붐이 일고 있었다. 불어가 유창했던 그의 주변에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몰렸다. 모네가 우키요에를 구입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당시 나와 큰 인기를 뜬 『예술의 일본(Le Japon artistique)』이란 잡지의 자료 역시 상당 부분은 그가 제공했다.
17세기 교토에서 만들어진 라쿠(樂) 다완
박람회 이후 그는 파리에 정착해 일본 미술공예품을 파는 상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20세기 들어 파리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하면서 일본만의 독특한 문화인 다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다량의 다도구를 1903년 세브르에 기증한 것이다.
1905년 귀국한 그는 자신이 파리에서 모은 서양회화를 가지고 미술관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도중에 급사하면서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가 미술관을 위해 파리에서 인상파를 비롯한 프랑스 근대회화 200여점을 모은 것으로 전한다. 이 그림들은 그의 사후 모두 미국과 유럽으로 다시 팔려나갔다고 한다.
세브르가 일본 도자기를 정식으로 구입한 것은 하야시의 기증 보다 훨씬 앞선다. 1878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나온 일본 도자기를 구입한 것이 처음이다. 이렇게 일찍 일본 자기에 관심을 보였으나 유럽 전체로 보면 영국보다는 늦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은 그 전신인 사우스캔싱턴 박물관 시절인 1876년에 필라델피아에서 미국독립1백주년을 기념한 만국박람회에서 상당수의 일본 미술공예품을 이미 구입하고 있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