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애쉬몰리언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있었던 올리버 임페이(Oliver Impey 1936-2005)는 동양에서 유럽으로 수출되 도자기의 연구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말까지 대개 6가지 종류의 동양도자기가 유럽에 수입되고 있었다고 한다.
인물도자기 1725년 중국 경덕진에서 주문 제작된 접시
중국 것으로는 청 강희제(康熙帝 1654-1722, 재위 1661-1722) 때 경덕진 민간가마에서 만든 오채와 녹채(綠彩)가 있었다. 그리고 복건성 덕화(德化) 지방의 백자 그리고 절강성 의흥(宜興)의 주니기(朱泥器)가 수입되고 있었다. 주니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철분이 많은 흙으로 구운 붉은 자기를 말한다. 그리고 일본 자기로는 이마리 청화백자와 가키에몬(柿右衛門)이 많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델프트 자기는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한 뒤에 이어 색깔이 든 오채를 본뜨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 북쪽의 유서 깊은 도시 루앙은 가까운 거리에 대서양으로 통하는 르아브르 항구가 있다. 루앙은 이 항구를 통해 프랑스의 어느 곳보다 일찍 델프트 자기의 영향을 받았다.
루앙 도자기는 델프트처럼 처음에는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그러다 중국 오채가 들어오면서 델프트처럼 붉은 색과 초록색, 노란색이 든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델프트도 그렇고 루앙도 중국의 오채와는 성격이 다르다. 중국의 오채는 백자를 한번 구운 뒤에 다시 적, 녹, 황의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낮은 온도에 다시 구은 것이다.
프랑스 루앙에서 만든 중국인물문양 접시(왼쪽은 1745년, 오른쪽은 18세기)
반면 델프트나 루앙의 채색자기는 오채라고 해도 백자를 굽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자기 이전의 도기 위에 백토(白土) 화장을 해서 구운 뒤에 채색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세브르에서는 이들 모두를 세라믹이 아닌 파이앙스로 설명하고 있다.
파이앙스이기는 하지만 루앙 자기에도 중국 이미지가 등장한다. 어색한 면이 없지 않지만 중국식 복장을 한 인물이 그려져 있다. 낚시하는 인물과 큰 우산을 쓰고 산책하는 인물도 있다. 아치가 있는 중국풍 돌다리도 보인다.
중국을 연상케 하는 이런 모티프는 18세기 들어 유럽에 대유행했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가구, 집기 등에 중국적인 이미지가 범람할 정도였다. 이런 문화적 현상을 시누와즈리(Chinoiserie), 즉 중국취향이라고 부른다. 앞서 소개한 임페이는 유럽의 시누와즈리 연구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든 마이센도 이 유행을 비켜가지 않았다. 처음에 청화백자를 만드는데 성공한 뒤 이내 채색 자기에 도전했다. 물론 계기는 델프트나 루앙처럼 중국의 채색자기였다.
채색 기술까지 곧 손에 넣게 된 마이센은 당시 군주의 뜻대로 인형 만들기에 도전했다. 아우구스투스 2세(August Ⅱ 1670-1733)은 유럽 최초로 자기를 개발해 판매가 늘어나자 그는 새로운 것을 주문했다. 이때 이미 뵈트거는 죽고 없었다.
새로 기사장이 된 요한 요아킴 켄들러(Johann Joachim Kändler 1706-1775)에게 내려진 명령은 동물인형 자기였다. 당시 유럽 왕족들은 취미로서 보물의 방, 즉 쿤스트카머(kunstkammer)를 가지고 있었다. 아구스투스 2세는 이것을 동물 자기로 채울 기발한 생각을 한 것이다.
켄들러는 각고의 노력으로 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수십cm 크기에 이르는 동물형상 자기를 600점 가깝게 만들었다.(현재 이들 중 약 60여점이 남아 전한다). 이때 쌓은 사실적 묘사 솜씨가 나중에 마이센의 명성으로 이어지는 마이센 인형도자기의 바탕이 됐다. 마이센의 인형은 당시 유럽 귀부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730년 작센에서 제작한 차 마시는 인물 도자기
세브르에 있는 차 마시는 인물형 도자기는 마이센에서 만든 전형적인 중국이미지의 자기이다. 얼굴과 윗옷에 보이는 금박은 중국의 신기술을 마이센에서도 개발해 전 유럽을 열광케 한 기술이다. 원래는 청나라 강희제때 개발된 금채(金彩) 기법이 바탕이 됐다. 이 기법이 유럽에 전해져 마이센에 흘러 들어갔고 일본에서도 이마리 자기의 한 종류인 긴난데(金襴手)로 발전했다. 이 인물이 들고 있는 찻잔은 물론 바닥의 것과 주전자도 모두 중국 청화백자를 흉내 냈다.
1740년 무렵 샹티이 도자공방에서 만든 중국인물형 도자기
마이센의 인형도자기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프랑스에서도 전해졌다. 샹티이에서는 일본의 가키에몬양식 도자기 외에 인형 도자기도 만들었다. 세브르에 있는 샹티이의 인물형 도자기 역시 중국인을 묘사했다. 오채 기법으로 괴석과 꽃나무를 그렸다. 그 위에 한 인물이 앉아 있다.
푸른색 도포를 걸치고 다리를 포갠 채 독서에 빠진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묘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렵 이렇게 정체불명의 동양인, 주로 중국인을 묘사한 도자기를 한데 묶어 당시 유럽에서는 마고(Magot)라고 불렀다.
세브르의 중국문양 도자기에는 좀 더 수준 높은 것도 있다. 서양의 두 남녀가 큰 나무가 있는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그려진 접시이다. 단지 산책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자는 팔로 여인의 허리를 감고 있다. 반면 여인은 어딘지 쉽게 끌려오는 포즈는 아니다. 가슴 쪽의 손에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랑의 약속을 받아내려는 것인가.
이 화려한 채색자기는 18세기 유럽 상인들이 중국에서 주문해 만든 것 중 하나이다. 만든 곳은 중국최대의 도자인 경덕진이다. 분채(粉彩)라는 심화된 채색 기법이 쓰였다. 이는 오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기술이다.
오채는 청화로 윤곽을 그린 뒤에 한번 구운 다음 구획선 안에 다시 각각의 색을 칠해 굽는 것을 말한다. 분채는 윤곽 안의 색이 점점 짙어지거나 옅어지는 바림 기법, 즉 그러데이션(gradiation) 효과를 쓴 것이다. 개의 가슴과 여인의 치마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다 회화적인 느낌이 드는 신 기법인 셈이다.
『중국도자사 연구』를 쓴 방병선 교수는 18세기에 유럽 수출된 중국도자기에는 이렇게 유럽인의 취향에 맞춘 것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남녀 연애풍속을 그린 것 외에 서양의 기독교를 테마로 한 것도 다수 주문했다는 것이다.(y)
*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