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도자기의 총본산은 두말할 것 없이 세브르다. 파리가 지척인 이 곳은 일찍부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의 분원(分院)과 같은 왕립제작소가 있었다. 오늘날은 물론 왕립 제작소라는 간판은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국립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 나란히 국립도자기박물관이 설립돼있어 프랑스 도자기문화를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 전경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이 커버하는 범위는 프랑스 도자기뿐만 아니다. 유럽을 넘어 전인류 문명사에 등장하는 도자기의 역사 전체를 다룰 정도로 범위가 넓다. 당연히 여기에 유럽 그리고 프랑스가 받아들인 동양도자 문화의 역사도 함께 소개돼 있다.
세브르는 파리 교외라고는 하지만 파리와 맞닿아 있을 정도로 가깝다. 관광객이면 누구나 찾는 라데팡스의 지하에 있는 역에서 노면전차 트램 2를 타면 곧장 일곱 정거장만에 세브르에 도착한다.
그리고 세브르 역에서 내려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박물관이고 공방이다. 나지막한 담장에 큼직한 글자로 Tmsw ‘세브르, 시테 드 라 세라믹(Sevres, Cite de la Céramique)’이라 쓴 간판이 걸려있다. 시테는 도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중심지, 발상지라는 뜻도 있는데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박물관뿐만 아니라 공방, 학교 등이 한 단지 안에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들 시설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것은 공방이다. 세브르 도자공방은 루이15세(재위 1717-1776) 시대인 1756년에 설립됐다. 파리 동쪽에 있던 방센느 제작소가 이전해오면서 시작됐다. 1760년에 왕립도자제작소로 격상됐고 혁명을 거치면서 국립도자기제작소로 이름을 바꿨다. 이 제작소는 지금도 박물관 뒤쪽에 그대로 있다. 이곳은 일 년에 한번씩 도자기를 만는 과정을 공개하는데 이때 일반인도 관람이 가능하다.
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1824년이다. 설립은 1800년에 소장으로 부임한 알렉상드르 브롱니아르(Alexandre Brongniart 1770-1847)가 주도했다. 30세의 이 젊은 소장은 광물학과 지질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런 학자적 기질에서 비롯돼 좀 더 나은 자기 제작여건을 갖추기 위해 각국의 자료를 수집한 것이 시작이 됐다. 프랑스 궁정컬렉션을 물려받기도 했고 또 해군에 의뢰해 해외 식민지의 도자기도 가져왔다.
이렇게 문을 연 박물관에는 유럽 각국은 물론 중동에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의 도자기가 갖추어져 있다. 현재 5만여 점에 이르는 소장품 중 아시아는 단연 한중일이 중심이다.
박물관 앞의 베르나르 팔리시 동상
이 박물관 정원에 커다란 동상 하나가 서있다. 허리춤에 접시 하나를 끼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흔히 이 동상을 보고 박물관을 설립자한 브롱니아르라고 여기기 쉽지만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동상의 인물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도공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 1510-1590)이다.
수 백 년에 이르는 도자 역사 속에 변변한 도공 이름 하나 전하지 않는 조선 사정에 견주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떤 도공이길래 동상까지 세웠을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인다. 하지만 그의 활약상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그는 프랑스 도자기제작의 여명기에 놀랄만한 업적을 남겼다. 르네상스의 말기만 해도 프랑스는 유럽에서 아직 문화의 변방으로 취급당했다. 그 시절에 그가 최초로 채색 유약을 개발함으로서 프랑스 채색도자기의 길을 연 것이다.
그는 원래 유리 제조공이었다. 유약 지식은 독학으로 익혔다. 그런 점에서 그는 흔한 도공이 아니라 연구자에 가까웠다. 만년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평판이 높아지면서 파리에 초청돼 10년 넘게 지질학, 광물학 강연회를 열어 생활했을 정도이다. 그는 이때 여러 편의 농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논문도 써냈다.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그는 나중에 일어난 신구교도 간의 갈등에 휘말려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연구에 대한 일화는 많이 전하는데 가난 때문에 집의 가구와 마루까지 뜯어 땔감으로 썼다는 내용도 있다. 이 연구 동안 어떤 인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샹티이 성의 초석을 놓은 안느 드 몽모랑시 원수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전한다.
1880년에 세워진 동상에는 그와 같은 이력이 반영돼 있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은 바로 연구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되새긴 것이다. 접시는 도공임을 말해준다. 발아래 놓인 것들도 모두 유약 개발과 관련된 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오른쪽에 있는 것은 암모나트이다. 왼쪽에 높이 쌓여있는 것은 석회석 블록과 유리로 모두 그가 유약을 개발하면서 썼던 재료들이다.
허리에 끼고 있는 큰 접시가 궁금한데 아래에서 쳐다보아서는 보이지 않는다. 자료 사진을 보면 접시 안에는 뱀과 개구리, 물고기, 소라 등이 조각돼있다. 한편으로 징그럽기까지 한 생물을 왜 접시에 담았을까 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건 오해이고 애초부터 이런 동물을 조각해 함께 구운 도자기이다.
기묘하달 수밖에 없는 이런 접시를 만든 것은 그가 프랑스 최초이며 나아가 유럽 최초이다. 이 또한 그의 공적 중 하나이다. 이 기묘한 접시는 박물관 안에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다. 루브르에 가도 이런 접시가 전시돼 있다.
팔리시가 만든 그로타장식 접시
이 그로테스크한 접시의 용도는 말할 것도 없이 장식용이다. 그 무렵 유럽 귀족들 사이에 그로타(grotta)라는 이색 취미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로타란 로마의 네로 황제가 만든 지하 궁전에서 유래한 말이다. 네로의 지하 궁전은 15세기 들어 우연히 발견됐는데 이곳에 기상천외한 장식물들이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런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한 이색 취미는 곧 귀족들 사이에 유행으로 번지게 됐다. 그로타는 지하 동굴을 가리키는 이탈리아 말이다.
팔리시는 1556년에 주석, 납, 철, 동, 안티몬, 코발트 등을 사용해 자연에 가까운 색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를 바탕으로 당시 유행하던 그로타 장식물로서 뱀과 물고기 등이 조각된 접시를 만든 것이다. 파리시 자신은 이렇게 만든 도기를 전원풍 기물(La Rustique Figurine)이라고 이름 지었다.
팔리시는 죽은 뱀이나 개구리를 가지고 직접 석고 틀을 떠서 이들을 정교하게 재현했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가 개발한 자연색에 가까운 유약을 발라 마치 접시 위의 동물들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햇다.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 이 전원풍 기물은 프랑스 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유럽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 앞에 세워진 팔리시 동상은 이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팔리시는 독일 마이센에서 최초로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 1682-1719) 그리고 영국에서 자기를 최초로 상업 생산해낸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와 함께 유럽 3대 도공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