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페렐 <샹티이성 조감도> 17세기 22.5x31.5cm
그림 속에는 성의 왼쪽 위로 꺽쇠 모양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이것이 한때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샹티이 성의 마사(馬舍)이다. 이 마사에 수백 마리의 말과 공의 사냥용 개가 사육됐다고 한다.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상티이성 도개교 앞에 세워진 사냥개 조각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오늘날 이곳에 콩데미술관 부속의 말 박물관이 있다. 말 박물관이 만들어진 것은 콩데 미술관보다 100년쯤 뒤의 일이다. 1982년 프랑스를 대표하는 마장곡예가 이브 비에네메(Yves Bienaimé 1955-)가 박물관 설립을 주창해 ‘살아있는 말 박물관(Musee Vivant du Cheval)’이 문을 열었다. 그 후 2005년 경마 애호가이자 영국의 사업가인 아가 칸 4세(Aga Khan IV 1936-)의 후원으로 샹티이 성 개발보존재단이 설립되면서 리뉴얼 공사가 시작됐다.
지금의 말 박물관(Musée du Cheval)은 이 과정을 거쳐 2013년에 재개관했다. 이 박물관에는 마장(馬場)을 딸려 있어 매주말 마술(馬術)쇼가 열린다. 이 이벤트는 관람을 하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다.
말 박물관의 컬렉션은 말할 것도 없이 동서고금의 말에 관련된 자료이다. 조각도 있고 그림도 있다. 또 공예품으로 분류되는 것도 있다. 당연히 동양의 것도 들어있다. 동양의 유물을 소개 하기 앞서 잠시 소개할 것이 있다.
피에르 베르네(Pierre Vernet 1780-?)라는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화가가 그린 <샹티이 경마>이다. 이 그림은 1836년에 이곳에서 처음 열린 경마대회를 그린 것이다. 멀리 보이는 마사를 배경으로 경주마 4필이 우승을 겨루는 장면을 그렸다. 이 말들이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네 발이 한꺼번에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것처럼 그려져 있다.
피에르 베르네 <샹티이 경마> 1836년 캔버스에 유화 83x129cm
‘사진과 미술’ 혹은 ‘사진의 역사’ 같은 제목이 붙은 책을 보면 으레 에드워드 머브릿지(Eadweard Muybridge 1830-1904)의 사진이 등장한다. 머브릿지는 영국의 사진사로 달리는 말을 연속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찍은 질주하는 말의 연속 사진은 제아무리 빨리 달리는 말이라 할지라도 네 발이 동시에 허공에 떠있는 경우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허공에 떠있는 네 발의 포즈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일본의 중국도상학 전문가 나카노 미요코(中野美代子) 교수는 프랑스 19세기 그림에 보이는 허공에 뜬 말의 포즈는 건륭시대 궁정화가로 활동한 귀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68-1766) 등이 그린 그림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고 있다.*
1759년 건륭제는 중앙아시아 준가리아 족과 위글 족의 반란을 무찌르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카스틸리오네와 이그나티우스 지켈바르트(Ignatius Sichelbart 1708-1780) 등 궁중의 서양화가들에게 전승기념도를 그리게 했다. 이것이 16매로 된 <준회양부평정득승도(準回兩部平定得勝圖)>이다.
이 득승도 중에는 청군 군사들이 네발을 허공에 나란히 뻗은 채 달리는 모습이 들어있다. 건륭제는 그림이 완성된 후 이를 동판화로 제작할 것을 명했다. 당시 중국내에서는 이를 해낼 기술이 없어 선교사 편에 파리로 보내 이를 만들어오게 했다.
전부 200부를 만든 이 동판화는 1775년에 돼서야 베이징에 돌아왔는데 제작비와 운송비용으로 당시 돈으로 24만 프랑이 들었다. 이 돈은 황제 대신 광동의 홍(鴻)이라는 상인이 부담한 것으로 전한다. 이때 건륭제는 한 부로 남김없이 모두 가져오라고 엄명했으나 파리에는 이 판화의 축소판이 나돌아 다녔다. 또 그 중 일부가 화가들에게 이른바 허공에 뜬 갤롭 포즈에 영감을 주었다는 게 나카노 교수의 주장이다.(현재 파리 기메미술관에 이 동판화가 전한다)
나카노 교수가 사례로 든 그림은 <메두사 호의 뗏목>으로 유명한 제리코가 런던에 있을 때 그곳의 유명한 앱섬 경마장에서 열린 경마를 보고 그린 <엡섬 경마(Derby d'Epsom)>(1822년작)이다. 여기에도 네 명의 기수가 지면과 평행하게 다리를 허공에 일직선으로 뻗은 경주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에르 베르네의 <샹티이의 경마>는 루브르에 있는 제리코 그림만큼 유명하지 않으나 그의 그림도 18세기 후반에 이뤄졌던 동서양의 회화교류 사정이 담겨있는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준회양부평정득승도> 중 제3화 「코르고스의 승리(和落霍澌之捷)」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준회양부평정득승도>는 중국에서 프랑스 동판화를 가지고 목판화를 다시 제작했다. 이를 가지고 찍은 방각본을 여러 행궁(行宮)과 사원에 보존하게 했다. 그리고 1789년 겨울에 연행한 정사 이성원(李性源 1725-1790)에게도 주었던 듯하다. 그는 이듬해 귀국보고를 하면서 이 목판화를 받아왔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이후 이 판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제 장식말 7세기 길이 35cm
다시 말 박물관으로 돌아오면 이곳에서 동양 유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당나라 때 만들어진 테라코타 말 한 쌍이 있다. 당나라 때에는 말이 어느 때보다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날의 자가용처럼 좋은 말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다. 그래서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까지 들어갔다.
의장용으로 묘사된 이 말 역시 부장품이다. 색채는 선명치 않으나 도기에 녹색, 적갈색 그리고 남색 계통의 유약을 발라 구웠다. 넓게 보면 당삼채(唐三彩) 계통이다. 당삼채는 전통 중국의 왕실의 도자기 컬렉션에는 들어있지 않다. 부장품인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랫동안 잊혀왔기 때문이다.
당삼채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이다. 일본의 골동노포 마유야마 료센도(繭山龍泉堂)의 전무이자 일본도자협회 회원인 가마시마 다다시(川島公之)에 의하면 당삼채는 1905년부터 1908년 사이에 낙양과 정주를 잇는 변락(汴洛) 철도가 부설되면서 연변의 당나라 무덤에서 처음 출토됐다고 한다.***
비록 도기이지만 화려한 색채에 사실적인 묘사로 당시 막 생겨나던 중국도자기 컬렉터들을 매료시켰다. 그 중에 말은 동양미술 컬렉션을 자랑하는 세계적 미술관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소장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이곳의 말은 유약 사용이 절제된 쪽이다. 안장 장식과 방울에만 일부 채색이 남아있다. 파스텔조의 색채가 한층 높은 격조를 느끼게 하는데 이와 꼭 닮은 말이 파리의 기메미술관에도 있다.
샹티이 성은 근래 영화 『바텔』로 유명해졌으나 성 지하에 있는 레스토랑의 이름은 바텔이 아니다. 라 카피텐느이다. 다만 ‘바텔 만찬’이라고 이름 지은 저녁 특별메뉴가 있기는 하다.(*)
*中野美代子 『綺想迷畵大全』 飛鳥新社 2007年.
**정은주 『조선시대사행기록화-옛 그림으로읽는 한중관계사』 사회평론 2012년.
***川島公之 「わが国における中国鑑賞陶磁の受容とその変遷」 『東洋陶磁』VOL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