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말 공이 런던에서 그림 수집을 시작한 데에는 다분히 이를 재건하겠다는 뜻도 있었다. 또 아버지 루이-필립 왕(Louis-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도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문화 정책을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되찾고자 했다. 루브르 미술관의 스페인 회화실은 그의 재임 중에 만들어졌다. 또 그는 베르사이유 궁에 프랑스 역사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그랑 생주리 방
콩데 집안의 이런 문화예술 취향은 거슬러 올라가 일본도자기를 재현한 루이-앙리 공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도자기에만 심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랑 콩데 공 이후 손보지 못했던 성을 재건하면서 집안 곳곳에 예술 장식을 남겨놓았다. 이것이 오늘날 샹티이 성 콩데미술관이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18세기 프랑스식 전통가구와 집기 그리고 장식품들이다.
그의 시절에 꾸며진 방 중에 조금 색다른 것도 있다. 그랑 콩데 공의 전공을 소개하는 무훈의 방 바로 앞에 있는 방이다. 이 방의 벽에는 이상한 모습을 한 원숭이들이 그려져 있다. 자연 속에서 뛰노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처럼 모자를 쓰고 사람 옷을 입은, 말하자면 의인화된 원숭이가 그려져 있다.
개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있고 막대기를 들고 줄타기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 어떤 원숭이는 종이를 펼치고 컴퍼스로 무언가를 재는 듯한 모습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고깔처럼 보이는 모자를 쓰고 있다. 그 사이에 사람의 모습도 보이는데 그 역시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유럽에서 이런 형태의 모자는 중국인을 상징했다. 이는 다분히 몽골의 유럽원정에 유래했다.
크리스토프 위에가 그린 생주리 벽화
이렇게 의인화된 원숭이가 그려진 그림을 생주리(Singerie)라고 한다. 생주리는 18세기 들어 프랑스에 크게 유행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앙트완 와토가 그린 것이 루브르에 있다. 유럽에서 원숭이는 동양과 달리 조금 모자란 사람을 가리켰다. 이들 벽화가 의미하는 뜻은 분명치 않다. 하지만 암시하는 것은 있다. 즉 영리한 동양인들이 모자란 원숭이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18세기 들어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경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으로 비춰졌다. 프랑스 백과사전파의 볼테르(1694-1778)는 중국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제국’이라고 했다.
또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1660-1731) 역시 그런 생각이었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의 속편에서 중국에 간 크루소를 등장시키며 ‘이곳 사람들의 위대함, 부, 위용, 정치, 생산기술, 상업, 예의 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는 말을 했다.
이처럼 18세기 초 중국은 도자기, 미술뿐만 아니라 조금씩 소개되는 정치, 제도, 경제에서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다. 샹티이 성의 생주리 벽화는 성의 재건 때 불려온 화가 크리스토프 위에(Christophe Huet 1700-1759)가 1735년 무렵에 그린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