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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대대로 모아온 중국 골동과 일본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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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티이 성의 동양미술은 서양미술과 달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렇다고 아주 홀대받는 처지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적당한 장소에 장식을 겸해 진열돼 있다. 그다지 눈에 띠지 않게 소개돼 있을 뿐이다.
현관에 들어서서 곧장 보이는 방이 알현 대기실이다. 이 방은 콩데 집안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커다란 벽난로 위에 성 주변을 그린 풍경화가 걸려있다. 그리고 안쪽으로 향하는 방문 옆에는 역대 성주의 초상화도 장식돼 있다.


알현대기실의 장식장

이 초상화 아래 방문 양쪽으로 장식장이 있다. 샹티이 성에서 처음 마주치는 동양 미술은 이 장식장 안에 들어 있다. 오말 공 이전의 역대 성주들이 수집한 골동품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상당수가 망실됐다. 오늘날 이 장식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콩데 집안의 마지막 당주였던 루이Ⅵ세 부르봉-콩데 공이 왕정복고 이후 되찾은 것들이다. 또 그 뒤에 오말 공이 새로 산 것들이 더해졌다. 
이 장식장 안에 들어있는 골동품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중국산이다. 도자기, 옥기, 청동기 등 다양하다. 도자기는 청대에 만들어진 오채(五彩) 도자기가 주를 이룬다. 개중에는 건륭 이후에 많이 만들어진 법랑 자기도 있다. 이들은 주로 중국의 민간가마에서 유럽 수출용으로 만든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이나 일본의 유명 미술관에 있는 중국의 관요(官窯) 도자기와는 전혀 다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이들은 당시 프랑스 귀족을 비롯한 상류 사회에서 원하던 이국취향을 충분히 만족시킨 것들이다. 


중국 오채도자기 


장식장에는 도자기 외에 청동 술잔을 옥으로 재현한 고(觚)를 비롯해 손잡이가 달린 옥 대접 그리고 옥제 불수감(佛手柑) 장식물이 있다. 도자기가 중국이 원산이 것처럼 옥 역시 세계적으로 중국만큼 그 가치를 높이 인정한 나라는 없다.
고대부터 옥은 제기로 쓰였다. 한(漢)대 들어 신선 사상과 연결되면서 불사불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유럽에는 옥에 대한 이런 인식이 있다. 중국의 옥 공예품이 유럽에 처음 전해진 것은 1860년 이후이다. 제2차 아편전쟁 때 북경이 진격한 영불연합군이 원명원(圓明園)을 약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외에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상아 장식품도 있다. 샹티이 성의 중국골동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여기서 1차 소개는 끝난다.   
그리고 일본 미술이 소개된다. 알현대기실 다음 방인 친위대 방에 일본 미술품이 있다. 이 방은 친위대의 방이었던 것처럼 유리장 속에 성의 무사들이 사용했던 칼과 창과 같은 무기류가 전시돼 있다. 일본 도자기는 이들 무기장 위에 놓여있어 자칫 놓치기 쉽다.
이는 홀대가 이유가 아니다. 원래 유럽에서는 동양도자기를 이렇게 장롱 위에 높이 올려놓았다. 이런 장식 전통은 17세기 이후 유럽의 동양무역창구였던 네덜란드에서 먼저 시작됐다. 대개 짝을 맞춰 쌍으로 올려놓아졌다.


친위대 방의 장식장


친위대 장식장 위에는 화려한 꽃문양으로 장식된 도자기가 좌우로 한 쌍씩 놓여있다. 각각의 뚜껑에는 당사자(唐獅子)과 매가 손잡이처럼 조각돼 있다. 이들은 18세기 후반 유럽에 수출된 일본 도자기들이다. 흔히 이마리(伊万里)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마리는 규슈 북쪽에 있던 도자기수출항 이마리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이들 도자기가 만들어진 곳은 내륙으로 더 들어간 아리타(有田)이다. 또 그 동쪽의 사가(佐賀) 일대도 있다.


뚜껑 있는 이마리 항아리 한 쌍(높이 64cm)


특히 사가현 일대에서 구운 도자기는 옛 지명을 따서 히젠(肥前) 도자기로 부른다. 아리타 도자기도 그렇지만 히젠에서 이처럼 뚜껑이 있는 도자기를 많이 구웠다. 이들 뚜껑 있는 도자기는 침향호(沈香壺)라고 부른다.
평소에 향목(香木)을 넣어놓았다가 손님이 오면 뚜껑을 열어 실내에 향이 풍겨 손님을 접대하는데 쓰인 도자기이다. 이 도자기는 히젠에서 17세기 후반부터 많이 구워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에 수출됐다.   
이 도자기는 중국 골동과 달리 프랑스혁명 이전에 콩데 집안 성주들이 수집한 것이다. 혁명 와중에 성이 감옥으로 쓰였을 때 이들은 모두 빼돌려져 다행히 난을 면했다. 혁명 당시 베르사이유 궁에서도 그런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오말 공이 망명에도 돌아와 성에 미술관처럼 꾸미면서 이들을 다시 꺼내 소개한 것이다.      
이 성에 있는 중국과 일본도자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슴갤러리에서 똑바로 가면 마주치는 곳이 보석장신구 전시실이다. 방도 로톤도처럼 둥글다. 역대 안주인이 사용한 보석과 장신구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 이 가운데 오말 공이 젊은 시절 구했던 동양미술품이 섞여 있다.


보석실의 녹채괴석초화문 항아리 한 쌍(높이 72cm)과 당사자괴석문 청화백자 항아리(높이 73cm, 가운데)


그 중 하나가 검은 바탕에 괴석과 국화 그리고 붓꽃을 그린 녹채괴석초화문병 한 쌍이다. 이 화병은 강희제(재위 1661-1722) 때 유럽에 수출된 도자기의 하나이다. 이는 오말 공이 영국에 가기 이전인 1846년에 파리의 앙리라는 가게에서 구입했다.
이 병에는 특이하게 그리스 앰포라의 손잡이처럼 보이는 황동 장식을 더해져 있다. 중국 도자기는 이렇게 장식을 더하는 일이 없다. 도자기를 금속으로 치장하는 일은 이슬람 전통이다. 이 도자기에 보이는 황동장식은 이슬람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더해진 것이다. 종려나무 잎사귀를 모티프로 한 장식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유행한 문양이다.
하지만 황동장식 자체는 훨씬 일찍부터 시작됐다. 루이 14세, 15세 시절 궁중의 모든 기물과 가구 등에 황금 장식이 더해졌다. 이는 이른바 로코코 양식의 한 패턴이다. 그것이 도자기에까지 옮겨온 것이다.
그 무렵 도자기에 이런 황동 장식을 더하는 작업은 마르상 메르시에(Marchant mercier)라 불리는 상인들이 도맡아했다. 이들은 화가나 소목장처럼 길드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잡화상에 가까웠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에 실내 장식의 요구가 크게 늘면서 이들은 그림뿐 아니라 가구, 도자기, 장식물 등 일체를 조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앙트완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 그림에도 제르생이란 마르상 메르시에의 가게를 그린 것이 있다.
이 녹채병과 나란히 있는 병 역시 마르상 메르시에의 솜씨가 더해진 일본 도자기이다. 원래는 청화백자이다. 푸른빛을 내는 코발트 안료로 국화꽃을 그린 다음 그 사이에 당사자(唐獅子)와 괴석을 그려 넣었다. 마르상 메르시에는 국화꽃 부분만 제외하고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만들었다.
이 화병은 오말 공이 1847년 강스베르라는 골동상에서 한쌍에 1,500프랑을 주고 샀다. 1,500프랑이면 당시 놀랄 만큼 비싼 가격이다. 1843년 창간의 삽화가 든 주간지 『일뤼스트라시옹(Illustration)』의 1년구독료가 30프랑에 불과했다. 또 이 무렵 빵 1kg값은 40상팀이었다. 상팀은 1프랑의 100분의 1이다.* 
  


일본의 청동향로


오말 공이 구입한 일본 미술공예품은 또 있다. 중정에서 현관을 거치지 않고 회화관으로 바로 통하는 문 옆에 서있는 대형 청동장식품이다. 아래쪽에는 원숭이가 그리고 중간에는 학이 조각된 이 장식품의 정체는 향로이다. 높이가 2m를 넘는 대형 향로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수출상품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본은 박람회를 상품수출의 기회를 삼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도자기, 칠기, 청동기를 내다 팔았다. 청동기는 에도 말기에 밀납주물법이 새로 개발되면서 세계 최고의 솜씨를 자랑했다. 
이 화병은 오말 공이 1891년 1월에 구입했다. 그는 그 전해에 새로 시행된 망명법을 피해 벨기에에 1년 동안 몸을 피하다 막 돌아온 때였다. 기록에는 파리 시내의 폴이란 골동상에서 구했다고 돼있다.(y) 

*小倉孝誠 『19世紀フランス夢と創造―挿絵入新聞「イリュストラシオン」にたどる』人文書院 1995.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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