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티이성 도서실
콩데미술관은 프랑스에서 루브르 다음으로 많은 고전거장회화를 소장하고 있다. 고전거장회화는 영어로 올드 매스터 페인팅(old master painting)이다. 이는 르네상스에서 18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활동한 뛰어난 화가들의 그림을 말한다. 여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루벤스 등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곳의 고전거장회화는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 이유는 설립자가 이들 그림을 일체 성 밖으로 가져나가지 못하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동양미술 소개에 앞서 이곳을 대표하는 명품 몇몇을 보고 가자.
성은 몽모랑시 원수의 기마상과 마주하고 있는 해자의 도개교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삼각형으로 된 작은 중정이 나온다. 그리고 이를 지나 현관에 들어서면 성 내부가 시작된다. 성내는 3파트로 나눠져 있다. 현관 정면에 보이는 접견실에서 시작되는 방과 왼쪽 그리고 오른쪽으로 펼쳐진 회랑이다.
오른쪽으로 이어진 회랑은 대성관(大城館)이라 불린다. 몽모랑시 원수가 샹티이 성을 짓기 이전에 있었던 성터 자리에 건물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콩데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을 보여주는 회화실이 있다. 왼쪽 회랑은 콩데 집안의 가족예배당이다. 예배당 가장 안쪽에는 그랑 콩데 공의 심장이 든 석관도 있다.
현관에서 마주보이는 정면이 몽모랑시 원수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건물은 대성관보다 규모가 작아 소성관(小城館)이라고 한다. 역대 콩데집안 사람들은 주로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이곳에 18, 19세기 프랑스 귀족들이 사용하던 세간, 집기, 장식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또 콩데미술관을 대표하는 명품 중의 명품도 이 소성관에 따린 도서실에 있다.
<베리공의 가장 호화로운 시도서>의 4월 부분
소성관의 첫 번째 방은 알현실이다. 도서실은 알현실 옆에 부속실처럼 달려있다. 이전에 오말 공이 서재로 쓰던 곳이다. 이 방의 세 벽에는 붙박이 책장이 붙어있고 선반마다 가죽 장정의 고서가 가득 하다. 방 한 가운데는 유리 진열장이 놓여있다. 여기에는 오말 공 컬렉션에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드로잉과 사본류가 상설 전시돼 있다.
1848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부친 필립 왕은 곧 하야하고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때 오말 공도 동행했다. 그때 나이 26살이었다. 이후 그는 23년간 런던에서 생활했다. 이기간 동안 그는 망명정치가의 아들에서 大컬렉터로 변신했다. 시작은 콩데 가문의 역사를 정리해 남기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자료 수집이 확대되면서 점차 서적과 사본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나중에는 회화와 드로잉까지 확대됐다.
당시 런던은 컬렉션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몰락한 왕족과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미술품들이 상당수 국외로 유출되면서 런던에 흘러들고 있었다. 이때 그의 컬렉션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사서였던 안토니 파니치(Anthony Panizzi 1797-1879)였다. 그 역시 망명객이었다. 모나코공국 출신으로 그는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관여하다 런던에 망명해 와있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사서였다. 그가 당시에 만든 서지분류체계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국제서지표준기술(ISBD)의 기초가 됐다. 그는 나중에 대영박물관 관장까지 지냈다. 관장 시절 남긴 유명한 업적이 중정의 원형 열람실 설립이다.
<베리공의 가장 호화로운 시도서>의 1월 부분
오말 공은 파니치의 도움을 받아 1,500여점에 이르는 중세와 근세의 사본(寫本)을 수집했다. 이 가운데 200여점은 그림이 들어있는 장식사본이다. 이들 장식사본 중에서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것이 <베리 공의 가장 호화로운 시도서(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이다. 사본 속 삽화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워 ‘가장 호화로운’이란 이름이 더해졌다.
시도서(時禱書)란 기독교인들이 하루 중 행하는 성무일과(聖務日課)를 적어놓은 책이다. 여기에는 기도문도 있고 찬송가도 들어있으며 또 달력도 있다. 콩데미술관의 시도서는 중세의 프랑스 왕족 베리 공(Duc de Berry, 1340-1416)이 1413년에 플랑드르 지방의 화공인 랭부르 형제(frères Paul, Jean et Herman de Limbourg)에게 주문한 것이다.
그러나 랭부르 형제는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1415년 무렵에 죽었다. 206매가 전부 완성된 것은 한참 뒤인 1485년이다. 이 시도서는 서양미술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랭부르 형제가 12달 달력에 각각의 행사를 그린 삽화 때문이다. 각 월력에 그려진 풍경 그림에는 서양미술사상 최초로 원근법적 묘사가 등장하고 있다.
이 시도서는 근세 이후 오랫동안 행방불명인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1856년 밀라노에 나타난 것을 오말 공이 놓치지 않고 손에 넣었다. 당시 구입 가격은 1만8천 프랑이었고 전한다. 오말 공은 이 시도서 덕분에 나중에 ‘필사본의 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샹티이 성 도서실에는 언제나 이 사본의 한쪽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물론 복제본이다. 오말 공은 사본에 대해서도 일체의 외부 전시를 금하는 유언을 남겼다. 비록 복제본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매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채색 사본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놓고 소개하고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