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미술하면 인상파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파리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동양미술의 중심지이다.
18,19세기 파리가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이들이 동양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자료가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한때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파리가 사랑한 동양미술을 통해 두 세계 사이에 이뤄진 오랜 교역과 이해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파리 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불과 30분 만에 닿는 곳에 샹티이 성이 있다. 이 성은 베르사이유 궁의 모델이 됐다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역사와 관련 에피소드도 많다. 또 루브르 못지않은 컬렉션이 자랑인 미술관도 있다. 컬렉션의 대부분은 르네상스에서 시작되는 서양 고전회화이다.
이들 사이에 섞여 그다지 눈에 뜨지 않지만 동양 미술품도 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는 방대한 양의 서양미술 컬렉션에 비하면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18, 19세기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귀족 가문이 동양미술에 어떻게 매료됐는지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성을 잠시 돌아보자. 샹티이 성은 국내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화를 통해 언젠가 소개된 적이 있다.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유명한 제라르 드빠르디외가 요리사로 나온 영화 『바텔』의 무대가 이곳이다. 영화에서 요리사 바텔은 자신의 생각대로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자 자살하고 마는데 이때 그에게 요리를 시킨 샹티이 성의 성주가 콩데가문의 루이 2세였다.
콩데 집안은 부르봉 왕가의 분가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명문이다. 루이 2세의 풀 네임은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Louis Ⅱ de Bourbon-Condé, 1621-1686). 그는 흔히 그랑 콩데 공으로 불린다. 용감한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 때문이다. 그는 23살 때 청년 장군으로서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출전해 대승을 거두면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영화 『바텔』은 그가 루이14세를 샹티이 성에 초대해 3일 동안 연회를 벌이면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역사에는 이때 그가 곧 있게 될 네덜란드 군과의 전투에서 사령관직을 맡을 욕심으로 루이 14세를 초대했다고 한다.
이런 명성으로 인해 성 마당에 서 있는 기마상은 쉽게 그랑 콩데 공의 동상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기마상의 주인공은 콩데공의 외증조부인 안느 드 몽모랑시(Anne de Montmorancy 1492-1567) 원수이다.
몽모랑시 원수는 샹티이 성을 세운 장본인이다. 샹티이에서 태어난 그 역시 뛰어난 장군이었다. 잇따른 전공으로 원수까지 오른 그는 14세기에 자그맣게 지어진 뒤 황폐한 채로 남아있던 성터를 사들여 샹티이 성을 세웠다. 기마상도 이때 세운 것이다.
역사에 샹티이 성의 이름을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다. 그러나 성은 몽모랑시 원수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콩데 집안에 상속됐다. 몽모랑시 원수의 유일한 손녀였던 샤를롯트가 그랑 콩데 공의 아버지, 즉 앙리 Ⅱ세 드 부르봉-콩데(HenriⅡ de Bourbon-Condé 1621-1686) 공과 결혼하면서 성이 콩데 집안에 상속된 것이다.
콩데 집안의 샹티이 성은 프랑스혁명 때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혁명이 진정된 뒤 성은 다시 콩데 가문에게 원상 회복됐다.
콩데 집안의 마지막 남자인 루이 Ⅵ세, 앙리 조셉 드 부르봉-콩데(Louis Ⅵ, Henri Joseph de Bourbon-Condé 1756-1830) 공은 오를레앙 가의 바틸드와 결혼했다. 오를레앙 가 역시 부르봉 왕가와 필적하는 명문이다. 그녀의 남동생 필립은 프랑스 혁명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Roi de Louis-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이다.
그러나 루이 Ⅵ세 콩데 공과 바틸드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루이 Ⅵ세 콩데 공이 죽은 뒤 샹티이 성과 콩데 집안은 필립 왕의 다섯 번째 아들에게 상속됐다. 그가 바로 샹티이 성의 마지막 성주인 앙리 루이 필립 도를레앙, 오말 공(Henri Philippe Louis d'Orléans, duc d'Aumale 1822-1897)이다.
그는 고모부에게서 성을 포함해 6억6천만 리브르라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리브르는 혁명 직후까지 쓰던 단위로 1프랑과 거의 비슷하다. 이때 그의 나이 8살이었다.
샹티이 성 성주의 계보
오말 공은 25살때 알제리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대대적으로 성을 개조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1948년에 혁명이 일어나 부친과 함께 런던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됐다. 원안대로 성이 개조된 것은 1871년 24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뒤의 일이다.
오늘날 관람객들이 만나는 샹티이 성은 이때 개조된 모습이다. 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앞쪽에 넓게 펼쳐져 있는 마장(馬場)과 마사 건물, 그 뒤로 이어져있는 넓은 정원 그리고 본채 건물이다.
샹티이-구비에 역(Gare de Chantilly-Gouvieux)에서 기차를 내려 숲길을 가로질러 20분 정도 걸어가면 맨 처음 보는 건물이 대형 마사(馬舍)이다. 대대로 콩데 집안에서 마구간으로 쓰던 곳이지만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마지막 콩데 공, 즉 오말 공의 고모부 시절에는 약 250마리에 이르는 말을 길러 유럽 최대의 마사로 불렸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 이곳 마사의 일부는 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 그 옆에 있는 넓은 경마장에는 매년 여름 프랑스 최고의 경마 대회가 열린다.
마사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성이 본채이다. 성 앞의 정원은 과거 그랑 콩데 공 시절부터 조성됐다. 베르사이유 궁처럼 엄격한 좌우대칭의 정형식(整形式) 정원이다. 이 정원은 베르사이유의 정원사인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 1613-1700)가 꾸몄다. 정형식 정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성의 정면 맞은편에는 당시 막 유행하던 잉글리쉬 가든, 즉 자연풍(自然風) 정원도 꾸며져 있다.
샹티이 성의 콩데미술관은 이렇게 성을 개조한 오말 공이 설립한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 대부분은 그가 망명 시절에 런던에서 수집했다. 당시 런던에는 혁명이후 바다를 건너온 프랑스 그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