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키 소메이와 조선미술전람회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는 일제강점기 한일 미술 교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조선미술전람회의 초기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한국인의 의식 속에 본받을 만한 화가의 전형으로 자리잡는다. 1920년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정치가 막을 내리고 문화정치가 시작된다. 1922년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관전인 제국미술전람회와 체제가 같은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한다.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을 자각한 한국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제전 못지 않은 규모와 체제를 갖춘다.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
특히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일본의 화가는 문전, 제전 심사를 역임한 화가들 중에서 선발하였다. 초대 심사위원은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 1873-1957)였다. 그는 일본 남화계의 최고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던 화가였다. 그를 초대 심사위원으로 초빙한 것은 일제가 한국의 미술계를 얼마나 신경썼는가를 보여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가와이 교쿠도는 처음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며 향후 일제강점기 미술사의 방향을 결정 짓는 심사 기준을 설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내세운 심사 기준은 '첫째는 품위(品位), 둘째는 기술(技術), 셋째는 고안(考案)'이다. 테크닉보다는 정신을 강조한 일본의 남화정신을 고스란히 주입하려 한 것이다. 이 기준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로 입신하려는 응모자들에게 금과옥조로 인식되어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2회 전람회 이후에도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 히라후쿠 햐쿠스이(平福百穂, 1877-1933), 유키 소메이 등 당대 일본 최고의 화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특히 고무로 스이운과 유키 소메이는 2년 연속으로 심사위원을 역임하여 조선미술전람회를 상징하는 심사위원 화가로 자리잡는다. 한국화단에서 우러러보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화가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화가들은 고무로 스이운과 유키 소메이 같은 화가가 되기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일본에 나가 그들에게 수학하기를 꿈꿨다. 이러한 일본의 저명한 심사위원들의 참여로 조선미술전람회는 빠른 시일 내에 체계적인 전람회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2. 일본 화가들에 대한 한국 화가들의 동경
조선미술전람회가 시작되고 일본 최고 수준의 심사위원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며 한국화단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동안 안중식, 조석진의 서화협회를 통해 장승업을 이은 조선시대의 미술을 근근히 전승해 오던 것이 미술 흐름의 전부였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일본이 새로 구축한 새로운 형식의 미술 양식이 물밀듯 들어오니 당시 한국의 화가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유럽 화단을 경험한 선진 화가들에 의해 구축된 일본의 '신미술', 또는 '신남화'라 불리는 것들은 서양화 기법과 일본화 기법이 교묘히 혼성된 매우 신비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조선 남화의 끝물에 머무르던 한국의 화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문화에 열광했으며, 대부분의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한국의 화가들이 일본의 새로운 미술사조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이 추구하는 시국에 맞는 그림을 그려 입상하여 성공하는 일과, 일본으로 직접 유학을 가 일본의 변화된 미술을 배워 오는 일 뿐이었다. 대개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화가 지망생들은 조선미술전람회가 유일한 통로였고, 경제적 여유와 학업의 기회를 얻은 이들은 직접 일본으로 가서 미술학교에 들어가거나 일본화가들의 화숙에 들어가서 공부하려 하였다. 이 때 일본화단에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왔던 화가들과의 인연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도쿄나 교토로 유학을 가면 먼저 찾는 것이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왔던 화가를 찾는 일이었다. 그때 한국 화가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화가가 고무로 스이운과 유키 소메이였다.
두 사람은 도쿄화단의 남화계를 대표하는 화가들로 식민지 한국의 화단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은 조선미술전람회 2회부터 6회에 이르는 동안에 각각 두 해 연속 심사를 하여 한국 미술 지망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상징적인 화가들이었다. 당시 한국인 화가들에게 유독 이 두 사람이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초기 조선미술전람회의 방향성을 제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일본인 화가들 입장에서도 두 번의 심사를 통해 한국에 대한 애정이 생겨 자연스럽게 인연이 만들어졌다. 유키 소메이 같은 경우는 이후에도 한국 화단에 많은 관심을 가져 14년 후인 1941년에 다시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정도였으니 한국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네 번 심사한 야자와 겐게스(失澤弦月) 다음으로 많은 세 번이나 역임한 일본인 화가였다.
이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자 한국의 화가들 중 이들의 지도를 받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아무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재직하고 있는 미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입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들이 운영하는 개인 화숙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또한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일례로 의재 허백련은 도쿄에서 고무로 스이운에게 지도를 받으려 하였으나, 실제 사제간의 관계는 맺지 못했다고 한다. 몇 년후 수운 김용수가 지도를 받으며, 한국인 최초의 제자가 된다. 또한 변관식은 1925년 김은호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29년까지 고무로 스이운의 화숙에서 공부하며 신남화풍을 배워 폭넓은 발전을 꾀하기도 한다.
변관식이 고무로 스이운에게 지도를 받을 때 김은호는 유키 소메이의 화숙에서 지도를 받는다. 또한 김은호는 유키 소메이의 주선으로 도쿄미술학교 청강생이 되어 수강을 하는 특전을 받기도 한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이 유키 소메이를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그의 지위가 너무 높아 사제간의 관계는 만들지 못했다. 남농 허건의 동생인 허림도 1940년 도쿄 가와바타미술학교에 유학하며 유키 소메이에게 배웠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보다 한국화 화가로서 처음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한 이한복이 유키 소메이와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한복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1926년 유키 소메이가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온다. 이때 이한복은 유키 소메이를 찾아가 친분을 나눈다. 두 사람은 미술학교 동문 선후배라 더욱 쉽게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는 유키 소메이가 파리 유학 중 그린 작품들로 《체불기념 파리 풍속》이라는 도록을 출간했는데, 찾아온 이한복에게 도록에 서명을 해서 선물하기도 한다.
유키 소메이 <파리 풍속>
3. 유키 소메이의 화가로서의 삶
유키 소메이는 도쿄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친척의 양자가 된다. 1891년 오카쿠라의 소개로 가와바타 교쿠쇼(川端玉章)의 텐신(天神) 화숙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가와바타 교쿠쇼에게 배우면서 1892년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한다. 그는 항상 먹통과 수첩을 휴대하고 다니며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사생했다고 한다. 1894년 유키 소메이는 가와바타 교쿠쇼의 내제자가 된다. 여기에서 같은 내제자였던 히라후쿠 햐쿠스이를 알게되어 의기투합하여 친하게 지낸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는데, 이는 인간적인 신뢰에 따른 것이었지 회화 기법상의 공통성 때문은 아니었다. 1897년 졸업 후 뜻한 바 있어 서양화과에 재입학하였으나 1900년에 서양화과 중퇴를 한다.
1900년 히라후쿠 햐쿠스이와 함께 무성회(无声會)를 결성한다. 그리고 문전과 제전을 기반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1904년에는 도쿄미술학교 조교가 되고, 1916년에는 금령사(金鈴社)라는 모임의 결성에도 참가한다. 1913년에 도쿄미술학교 정교수가 되고, 1919년에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교수를 겸임하기도 한다. 또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영국, 독일과 프랑스에 유학하여 새로운 미술 사조를 습득한다. 이 때의 경험이 유키 소메이의 작품 세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서구의 대생과 맑은 수채화의 영향을 받아 감각적이면서도 맑은 화면을 보이는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그린다. 1926년과 1927년, 1941년 모두 세 번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33년에 일본 제국미술원 회원이 되고, 1937년 제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4. 유키 소메이의 <금강산>
유키 소메이의 <금강산>은 1926년 이후에 제작된 작품으로 일본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 소장품이다. 크기는 세로 61.3cm이고, 가로 92cm이다. 바탕은 비단이며 먹과 채색을 사용하였다. 이 작품은 본래 다카마스 노미야 집안 소장품이었다. 그런데 다카마스 노미야 집안의 하야마 별장에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을 지을 때 기증되었다. 선묘나 갈필을 사용하는 등 일본 남화 풍이 그대로 살아 있다. 1926, 27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왔을 때 금강산을 구경하고 사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개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에 오면 먼저 금강산을 보고 싶어했던 것을 고려하면 1926년 작품일 개연성이 높다.
유키 소메이 <금강산>
이 작품은 금강산의 대표적 절경인 만물상의 여름 날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운무가 가득한 중첩된 산봉우리들을 원경으로 처리하고, 가장 인상적인 봉우리를 근경으로 바짝 끌어 당겨 그렸다. 이렇게 주제가 되는 소재를 눈 앞으로 끌어 당기는 포치 방식이 일본화의 독특한 구성 중의 하나이다.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치밀한 데생이 가장 먼저 눈에 띤다. 금강산의 바위결을 완전히 이해한 듯 묘사의 손길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이렇게 안정된 감각으로 금강산을 그린 작품은 흔치 않다. 이런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붓 솜씨와 함께 그림의 바탕이 된 천의 속성을 잘 살려 그렸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름 날 금강산의 푸르름을 산뜻하면서도 감각적인 색채로 그려냈다. 마치 수채화 화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그가 프랑스 유학을 하며 익힌 새로운 감각이 더해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일본화를 '신남화'라 하는데, 유키 소메이도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이 작품 <금강산>은 유키 소메이의 신남화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성취를 보인 대표작이다. 또한 한국의 금강산을 그린 모든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명품이라 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