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구 근대미술사를 언급할 때면 항상 등장하는 이름이 '서동진'이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로 두각을 나타낸 '이인성'과 '김용조'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동진에게 배운 곳은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이 아니라 '대구미술사'라는 상업기관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를 '일종의 미술종합센터'라고 하지만, 실제 그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체불명이다. 그곳에서 제작한 어떠한 결과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미술계에서는 광고물, 간판, 출판 등 다양한 것을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당시 서동진, 이인성 등이 관여한 영과회나 향토회 등의 팜플릿 등을 제작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 또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대구 근대미술의 거물 3명이 관여한 곳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필자는 얼마 전 대구미술사에서 출판한 책 한 권을 발굴하여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이 국내 유일본이 아니라면 처음 발굴한 것은 아닐텐데, 아직 대구미술사에서 발행한 것이라는 미술계의 보고가 없으니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혹시나 대구미술사에서 발행한 다른 자료가 나오면 종합해서 논문 형식으로 발표할까 했으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워 급한대로 소략하게나마 기록을 남긴다.
책의 이름은 《생육신, 사육신 필첩》이다. 생육신 여섯 분, 사육신 여섯 분의 편지 글을 모은 것이다. 한지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어 얼핏 친필로 보이나 순지 종류의 한지에 석판으로 인쇄한 필첩이다. 원래 한 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영인한 것이 아니라, 박팽년의 후손인 경북 성주에 사는 박해룡이란 이가 나서서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발행 시기는 소화 10년이니 1935년이다. 이때는 이인성이 유학을 떠난 후이고, 김용조가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인쇄자는 서동진이고, 인쇄한 곳은 '대구미술사'이다. 발행소는 만휴당이라 되어 있는데, 박해룡의 집 당호로 보인다. 또한 연판의 기록을 보면 당시 대구미술사는 '경상북도 대구부 수정(壽町) 62번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생육신, 사육신 필첩》은 12쪽 분량의 서첩이지만, 전설처럼 전해오던 대구미술사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자료이다. 대구미술사는 그동안 전해오던 대로 미술, 출판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서첩은 대구미술사가 좋은 석판 인쇄기를 갖춘 출판사를 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 자료를 계기로 그동안 자료가 나타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대구미술사의 자료가 더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한국 근대미술의 중요한 인물 세 사람이 대구미술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함을 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