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전성규의 작품으로 전하는 실물 작품이 없었다. 그동안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던 그의 작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하였을 당시 도록에 실었던 두 점의 작품을 확인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이 전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전통 공예가들은 공방에 소속되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여러 명이 역할을 나누어 일하는 등 공동 작업의 속성이 강하였던 이유가 가장 크다.
또한 이들이 만들었던 작품도 생활용품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한 예술가의 창조성이 발휘된 개인적인 창작물이라는 생각은 매우 적었다. 개인적인 능력이 우선시되지 않고 각각이 속한 제작소에서 생산해내는 작품의 우열이 더 중요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작가들은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성규 또한 같은 이유로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대부분 넣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성규는 1934년과 1937년 두 번의 조선미술전람회에 나전칠기 작품을 출품한다. 1934년에는 <나전연거(螺鈿硯筥)>를 출품하였으며, 1937년에는 <산수궤(山水机)>를 출품한다.
전성규 <나전 연거(螺鈿硯筥)>
1934년 제11회에 출품한 작품은 <나전연거(螺鈿硯筥)>라는 제목의 벼루를 넣는 나전칠기 상자였다. 줄음질과 끊음질을 잘 활용하여 만든 화려한 작품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를 ‘연상(硯箱)’이라 하고, 아래쪽에 서랍을 넣어 높게 만든 것은 ‘연상(硯床)’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연갑(硯匣)’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이름을 ‘자개연상’ 또는 ‘나전연상’이라 부르는 등 다양하게 불린다.
그런데 전성규는 이 작품의 제목을 ‘나전연거’라 하였다. ‘나전으로 만든 벼루 집’이라는 뜻이다. 흔히 쓰지 않는 명칭이었다. 그는 기존에 써 왔던 명칭과는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름을 붙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실제 쓰임새를 고려하여 쓰임새에 가장 가까운 느낌이 들도록 이름을 지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정교한 예술품이니 제목의 아름다움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는 구태의연한 구습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아니었다. 새로운 실용적 목적에 따라 작품을 만들고, 실용적 의미에 가까운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실학적인 작가이기도 하였다.1)
전성규 <산수궤(山水机)>
1937년 제14회에 출품한 작품의 경우도 전성규의 작가 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때에 출품한 작품은 직사각형 형태로 된 교자상(交子床)의 형태를 한 대형 작품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산수궤(山水机)>라 하였다. ‘산수궤’는 ‘산수 문양으로 새긴 책상’이란 의미이다. 조선시대 가구에는 ‘궤’라는 발음으로 불리는 것이 두 종류가 있는데, ‘궤(机)’는 책상을 의미 하는 것이고, ‘궤(櫃)’는 돈궤와 같은 장방형의 가구를 말하는 것이다. 간혹 이 두 가지의 용어가 한글 발음으로 같아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산수궤>와 같이 화려한 형태의 상들 중에서 궁중에서 사용하던 것을 일러 일반적으로 ‘대궐반(大闕盤)’이라 부른다. 특히 나전칠기로 정교하게 만든 이러한 상은 그 화려함과 품격 면에서 민간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웠고, 대개 궁중이나 높은 직책에 있는 부유한 계층이 사용하였다. 대궐반은 대개 고급 소재인 나전칠기를 사용하거나 주칠을 칠하는 등 민간의 소박한 상과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상판의 문양을 대범하게 시야가 넓은 구도의 산수를 사용하였다. 굳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름을 짓자면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山水紋螺鈿漆大闕盤)>이라 할 만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전성규는 이 귀한 ‘대궐반’이란 이름을 버리고, 단순하게 ‘산수문양을 한 책상’이라는 뜻의 <산수궤(山水机)>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한 큰 상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넣은 이 작품을 조선조 궁중에서 사용했던 구시대의 유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궐반(大闕盤)’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궤(机)’라는 의미를 택하였다. 궁중 용어를 버리고 평민들의 용어를 택하였으며, 특별한 것을 버리고 평범하게 생각하고자 하였다. 의례적이며 일상적인 이름을 탈피하여 새로운 형식의 이름을 짓기를 좋아한 전성규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적인 이름보다는 작품의 실용적인 쓰임새에 따라 현실적인 이름을 짓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궁중의 임금이나 썼을법한 <산수문나전칠대궐반>이 평민들의 밥상이나 사무용 책상이 지니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 또한 근대적인 공예가 전성규가 가지고 있었던 가구에 대한 근대적 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전성규는 이전의 나전칠기 장인들과는 근본적인 생각이 달랐다. 다른 장인들이 조선의 전통을 있는데 급급하였던 반면에, 전성규는 조선의 전통을 잇되 기법이나 형태를 현실에 맞는 작품으로 창조하려는 현대적 의미의 작가 정신을 가졌던 장인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法故創新)’을 인식하고 있었던 선지적인 장인이었다.
또한 전성규는 자신의 작품에 작가의 이름을 넣은 최초의 나전칠기 작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조선조의 전통공예를 하던 장인들에게는 개인의 이름보다는 자신이 속한 제작소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전성규, 김봉룡 등이 운영하던 ‘삼청동 공방’, 엄항주 등 엄씨 일가들이 운영한 ‘엄씨 공방’이나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조선미술품제작소’ 등 소속된 단체의 이름이 곧 작가를 의미하였지 개인의 이름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전성규는 이러한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1925년 파리만국공예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며 자신의 이름과 제자 김봉룡의 이름으로 분리하여 출품한다. 나전칠기 작품을 개인의 차별화된 예술적 의식을 담은 창조적인 예술품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출품이 한국의 나전칠기 장인이 개인의 이름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은 최초의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성규는 작품을 만들며 상판 왼쪽 위편에 한시를 각하여 넣고, 끝에 ‘수곡 전성규(守谷 全成圭)’라는 이름을 넣고, 그 아래 부분에 인장을 그려 넣었다. 동양화가가 산수화를 그린 후에 화제를 쓰고 낙관을 하는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작품 기법 면에서 조선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생각과 공예품도 개인의 창작품이라는 의식이 담겨져 있다. 한시는 도판의 상태가 좋지 못하여 판독이 어려워 알기 어렵다. 그림 도안인 산수화에 어울리는 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수궤>라는 이름은 나전칠기를 궁중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쓰는 것이 아닌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가구라는 전성규의 근대적 의식이 담겨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 그는 정성들여 만든 커다란 상을 민간과 괴리된 궁중의 화석화 된 유물로 남기기보다는, 민간에서 필요한 이라면 누구든 아무나 쓸 수 있는 가구로 남기고 싶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상황은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가 된 슬픈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왕조의 의식이 약화되고 반상의 구분이 사라져가는 새로운 시대였다. 왕조를 위한 진상품의 의미도 퇴색되었고, 왕조를 위한 일도 전처럼 많지는 않았다. 진상품을 만들던 장인들도 이제는 자신들의 일을 찾아야 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들을 불러 모아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 작품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든 작품들은 점차 조선의 맥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왕직에 소속된 일본인 장인들과 우리의 장인들은 조선의 감성을 담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삶과 의식을 담은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때로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을 위한 기념품과 같은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품은 형식과 기법은 조선 전통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지만, 목적은 일본인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재료로 일본인을 위해 새로운 디자인과 형태를 개발한 식민문화의 한 정형을 보여주는 굴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전성규는 한국인이 현실 생활에서 쓸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다. 완상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품 보다는 실생활에 필요한 가구를 만들고 싶었다. 나전칠기를 세계화하려 하고, 대량 생산을 강구하였던 그의 생각은 나전칠기를 민중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게 하려는 근대 의식의 소산이었다. 결국 이러한 의식은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각 작품 속에 드러나는 그의 의식은 당시 전통의 답습에만 머무르던 공예 업계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지침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궁중에서만 쓰였던 ‘대궐반’도 전성규의 눈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책상’에 불과하였다. 조선조에서는 궁중의 상으로 쓰였을 상이지만, 개화된 새로운 시대에는 업무를 보는 훌륭한 책상, 곧 테이블(table)의 개념으로 바꾸어도 좋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가 만든 <산수궤>는 조선의 유물인 <대궐반>이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인 전성규의 개인적 창작 의식이 만들어 낸 근대 공예작품 탁자 <산수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의 특별한 의식을 지녔던 나전칠기 세계의 전설로만 기억되어 오던 전성규의 작품은 한 동안 실물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의 수제자 격이었던 김봉룡의 작품을 보며 전성규의 체취를 느끼곤 하였다. 전성규의 작품은 오래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이나 애호가들은 전성규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산수문나전칠대궐반>
그러던 2012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나전칠기를 연구하고 수집해온 손혜원 관장의 노력에 의하여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성규의 작품을 발굴하게 된다. 일본의 수장가가 전성규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것도 전성규의 수결이 들어가 있는 대형 작품이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번의 접촉 끝에 손혜원 관장은 근대 공예의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적지 않은 액수의 금액을 지불하고 작품을 손에 넣고야 만다.
이 장면은 마치 서예가이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연구자였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에게서 추사 김정희의 명품 <세한도(歲寒圖)>를 되찾아 오던 순간과 유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역사적 순간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전성규의 작품이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만일 이때를 놓쳤더라면 한국인이 사들이지 못해 일본에 있게 된 안견(安堅)의 천하명작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운명과 같은 슬픈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전성규의 작품은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산수궤>와 거의 같은 형태와 양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사들여 이제껏 보관하던 작품으로 상태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정교하게 도안된 구성과 세밀한 솜씨로 만들어졌으며, 규모도 크고 상태도 거의 완전하여 근대에 만들어진 나전칠기 작품으로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새로이 근대유물로 지정해도 될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인이 보관하고 있을 때에는 제목이 따로 붙여 있지 않았었는데, 새로운 수장가를 맞이하여 많은 연구자들과 나전칠기 인간문화재 장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새로이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하여 새로 지어진 이름이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山水紋螺鈿漆大闕盤)>이었다. ‘대궐반’이라는 명칭이 약간은 부담스러웠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명명법은 아니었다.
이러한 명칭은 이 작품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2014년에 열린 부산근대역사관의 전시 <근대 나전칠기 공예>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2) 이 전시는 나전칠기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게 하는 특별한 전시로 주목을 받았다. 이 전시가 끝나고 얼마 후 2104년 11월, 연구자이자 수집가인 손혜원의 소장품들로 서울 남산 자락에 한국나전칠기박물관이 세워졌다. 개막전으로 열린 전시회의 중심 작품으로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 전시회에 출품된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의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상판에 도안된 산수문을 금강산으로 생각하여 <나전칠 금강산그림 대궐반>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런데 제목의 변경이 왠지 개운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3) 속의 풍경을 금강산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옳은 해석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성규와 그의 제자인 김봉룡, 송주안 등이 남긴 도안 원본을 보면, 이와 유사한 구도를 가진 산수화 문양이 종종 보인다. 이러한 도안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산수화와 비슷한 구성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에 배경이 되는 원경(遠景)의 중첩된 산만 금강산처럼 뾰족뾰족하게 개선하여 구성한 것이다.
이는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 유행하였던 ‘향토색(鄕土色)의 구현’이라는 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식민지 한국의 문화적 통치를 위해서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출품자들에게 ‘조선색(朝鮮色)’을 드러내기를 권장하였다. 작가들은 조선의 역사나 풍속을 소재로 작품을 하기도 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작품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의 아름다운 풍광 중에서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금강산 풍경이었다. 기이하고 아름다운 금강산은 특히 일본인이 좋아하여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품과 상품의 소재가 되었다.
전성규도 당시의 풍조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도안에 금강산의 산세를 참고하여 새로운 도안으로 변형하여 만든 것이다. 사실 이러한 풍경은 실제 금강산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금강산에는 이와 구도의 장소도 없을뿐더러 금강산을 표현한 작품 중에서도 이와 같은 구도를 가진 예가 없다. 그럼에도 이를 ‘금강산 문양’이라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풍경은 금강산의 산세를 참고하여 디자인한 이상적이며 관념적인 풍경일 뿐이다. 그래서 전성규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며 굳이 금강산이란 명칭을 넣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은 단지 ‘산수문’을 사용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굳이 전통적인 명칭을 한다면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山水紋螺鈿漆大闕盤)>의 상판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은 상판의 크기가 세로는 85.3cm이며, 가로 121.1cm이고, 높이는 35.5cm이다. 작품의 상판 왼쪽 위편에 7줄로 구성된 7언 절구 한시를 각하여 넣었다. 한시 다음에 ‘수곡(守谷) 전성규 (全成圭)’라는 호와 이름을 넣고, 그 아래 ‘수곡(守谷) 전성규인(全成圭印)’ 라는 주문방인 형식의 도장 형태를 그려 넣었다. 한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많은 연잎 속에 절 하나, 萬疊芙蓉一梵宇
다리 건너고 나무숲 지나 강남을 내려간다. 渡橋穿樹下江南
석양 질 무렵 포구 끝 한 켠에 앉았으니, 邊坐極浦斜陽裏
두 세 마리 백조가 선명하다. 白鳥分明見兩三
그동안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던 <산수궤> 속의 상판에 조각되어 있던 한시의 내용을 알 수 없었는데, 이 작품이 발견됨으로써 산수 도안 뿐 아니라 한시도 같은 글귀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을 토대로 사진속의 <산수궤> 상판의 한시를 대조하여 보니 시의 내용과 구성 방식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똑같은 것이었다.
이 작품은 전성규의 1937년 작 <산수궤>와 거의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상의 모양도 거의 같고, 상판의 산수 문양도 같으며, 화제로 쓰인 시와 수결이 있는 것도 같다. 상판의 문양은 같은 반면에 다리 부분의 <산수궤>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다리의 형태는 유사한데 그 위에 나전으로 새겨진 문양이 매우 다르다. 다리의 전체적인 느낌도 새로 발견된 것이 좀 더 날렵하게 잘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산수궤>의 문양이 소박하며 상의 전체적인 균형이 조금 더 듬직하다면, 새로 발견된 것은 조금 더 세련되면서 가볍지만 미끈한 느낌이 드는 면이 있다. 아마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수궤>가 발표되자 그의 명성을 아는 일본인이 이와 유사한 작품을 주문하여 그의 취향에 따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산수문나전칠대궐반>의 제작 연도는 1938년 이후로 보인다. 제작 기간이 거의 1년여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성규 삶의 거의 말년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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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우에 따라서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한국의 정통성을 말살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궁중 유물의 이름을 일반화시켜 부르도록 하였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지만 전성규의 일관된 행동을 보면 작가의식에서 나온 것이 맞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전성규의 근대 작가로서의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다.
2) <근대 나전칠기 공예>, 부산근대역사관, 2014, 148-151쪽.
3) 손혜원 소장품의 이름이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과 <나전칠 금강산그림 대궐반> 두 가지로 쓰이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두 가지 중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이 올바른 이름으로 생각되어 공식이름으로 사용한다. 이후 달리 쓰는 옳다는 상황이 생기면 그에 따르도록 할 것이다. 본래 작품의 명칭은 작가가 붙인 것이 우선이고, 다음은 소장가가 격에 맞는 이름을 붙이면 그에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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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우에 따라서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한국의 정통성을 말살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궁중 유물의 이름을 일반화시켜 부르도록 하였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지만 전성규의 일관된 행동을 보면 작가의식에서 나온 것이 맞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전성규의 근대 작가로서의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다.
2) <근대 나전칠기 공예>, 부산근대역사관, 2014, 148-151쪽.
3) 손혜원 소장품의 이름이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과 <나전칠 금강산그림 대궐반> 두 가지로 쓰이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두 가지 중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이 올바른 이름으로 생각되어 공식이름으로 사용한다. 이후 달리 쓰는 옳다는 상황이 생기면 그에 따르도록 할 것이다. 본래 작품의 명칭은 작가가 붙인 것이 우선이고, 다음은 소장가가 격에 맞는 이름을 붙이면 그에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