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미술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가까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어떤 화가들이 활동하고 어떤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그 본모습에 대해서는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필자 황정수 선생님은 이 칼럼을 통해 오랜 기간 현장에서 수집한 다양한 자료와 해박한 관련지식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근대 화단의 화가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필자 : 황정수(선문대, 미술사)
1.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의 변모양상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다. 개인적인 슬픔의 기억일 수 있고, 무력한 조국의 아픔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 일제강점 36년은 아픈 기억이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기억하면 친일의 무게가 느껴지고, 잊으면 미술사에 40여년의 공백이 생긴다. ‘역사의 공백’이라는 더 무서운 현실이 닥치기 전에, 우리는 치열한 연구와 탐색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찾아 더 나은 후일을 준비해야 한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 조선후기 미술계의 마지막 장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화가는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과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 1853-1920)이다. 그 들은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으로서 쇄락해가는 조선미술의 마지막 불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당시 새로운 미술 경향의 축인 청나라에 들어가 견문을 넓히고 돌아와 곧 도래할 새로운 미술시대를 준비하기도 한다.
1911년 이왕가의 후원으로 설립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1919년 민족서화가들을 중심으로 서화협회가 결성되자 주도적 역할을 한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의 뒤를 이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기도 하지만, 근대화 여명기의 새로운 미술시대를 여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초기 근대 미술의 구심점이기기도 하다.
‘도화서(圖畵署)’로 대변되어 왔던 조선의 미술은 ‘개화’라는 명분하에 밀려오는 열강들의 정치적, 경제적 압력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미술세계와 마주치게 된다. 세필로 그린 어떤 그림보다도 완벽하게 세상을 재현해내는 사진기술의 보급은 무지몽매한 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사진을 바탕으로 한 미술제작 방식은 혁명과도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그 동안 청나라를 통해 들어왔던 서양화법의 전래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들이 조선을 점유하며 이식시킨 인상파 중심의 서양미술은 고루한 조선 미술 세계를 뒤엎을 만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도화서 화원이 아니면 접근도 어려웠던 왕의 초상을 서양인에게 맡겨 서양화로 그리고 일본인 화가가 초빙되어 화원들을 대신하여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갈수록 유쾌하지 않은 일이 되풀이되며 우리 미술사는 점차 일본 미술과 서양의 미술이 자리 잡는 이식된 미술사로 변모되고 있었다.
일제의 야욕이 본격화되던 초기에 조선에 들어와 활동한 일본인 화가들의 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열강들의 격전장이었던 당시의 조선에 머물며 활동했던 순수미술가로서의 화가들은 거의 없었다. 여러 기록을 통해 유추해보면 합방된 1910년 이전에는 개인적 활동을 위해 내한한 화가들은 몇 사람 안 되는 듯하다. 합방이 되고 각 분야의 사람들이 물밀 듯 들어오게 되자 일본인 화가들도 서서히 조선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된다. 조선에 정착한 화가 중 일부는 소규모 단체를 만들거나 사숙을 통해 활동한다. 일본인 화가들이 두드러지게 전면에 나오는 것은 문화정책이 시작되고 미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이다.
2. 문화정치와 조선미술전람회
제국주의 침탈에는 항상 식민지인들을 계도하기 위한 문화정책이 행해진다. 3.1운동으로 조선에 민족주의 정신이 되살아나며 독립에의 의지가 극도로 치솟자, 당황한 일본은 문화통치의 방법으로 민심을 유화하려 한다. 이 때 문학, 음악, 미술 등은 ‘내선일체’의 이론적 뒷받침을 하는 이론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편의 하나가 미술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 개최였다.
1922년 제1회 전람회가 열린 후, 1944년 제23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린다. 관에서 개최한 이 전람회는 공모전 형식이었다. 창설 초기에는 1918년에 설립된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오세창이 중신이 되어 설립한 <서화협회>와 대립하는 성격이었다. 서화협회는 민족주의 경향이 강한 민간주도 단체였던 반면, 조선미전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사업으로 관제 행사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식민통치가 길어지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대형 행사로 자리를 잡았고, 미술계 신인 등용의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많은 유명 미술인들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문부성 주최의 전람회인 문전(文展) 또는 제국미술원전을 본 딴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 조선 미술의 특성을 살려 서예 부문이 추가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으나 중반 이후로 갈수록 일본인의 비중이 더욱 늘어났다. 제15회 전람회부터는 추천작가 제도가 신설되어 기성 작가들의 작품 발표 무대로도 활용되었다.
이 전람회는 많은 미술가를 배출하는 순기능이 있었으나, 관전 형식으로 인해 미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를 촉진하여 화단이 일본화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식민지하에서 관전인 조선미전을 거부하고 화가들이 활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많은 조선인들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관전인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고자 하였다. 특별한 배경이나 학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겐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화가나 내지의 화가들도 출품하였으며, 이들은 일본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아마추어 화가인 경우가 많았다. 심사위원은 일본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일급 작가를 초빙하여 맡도록 하였다. 일본에서 초빙한 화가가 심사위원이 되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이 많이 참여하자 조선미전의 성격은 점차 일본화 되어 일본화풍의 범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다. 일본화의 경향, 식민지하의 로칼리즘, 향토색 추구 등은 조선미전의 대표적인 경향이 되었다. 자연히 조선인들의 그림도 상을 타기 위해서는 일본화풍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인 출품자들의 작품은 크게 둘로 나뉜다. 일부는 일본의 전통적인 그림을 출품하였고, 일부는 조선의 경치와 풍속, 인물을 그렸다. 점차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늘어났으며, 작품의 수준도 갈수록 높아졌다.
비록 식민지하의 로칼리즘, 향토색 등 피지배 민족의 현실을 애상적 정서로 담은 작품들이라 하더라도 23회에 걸친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조선의 풍광을 담은 많은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라 각 작품의 완성도는 매우 높은 작품들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이왕가, 창덕궁 등 기관에서 구입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 현재 출품되었던 많은 작품들이 박물관이나 여타 기관 또는 일본 어느 곳에 소장되어 있을 텐데 현재 전하는 출품작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3. 현전하는 일본인 화가들의 작품에 관한 소견
일제강점기에 조선과 관련된 소재로 그림을 그린 일본 화가들을 추적하는 일은 자료의 빈곤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당시에 조선에 거주하며 그림을 그린 화가로 한정하여 찾는 것은 더욱 어렵다. 조선에 거주하지 않았지만 조선과 관련된 작품을 포함하더라도 폭이 크게 넓혀지지는 않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45년 광복 후 전모를 공개하지 않다가, 2001년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일본 작가들의 미술품이 상당수 있다. 일본화 93점, 양화 37점, 조각 20점, 공예 44점 등 198점이다. 이 작품들은 1930년대에 창덕궁과 이왕가에서 구입하고 일부는 작가가 기증했다는 내력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다.1) 당시 창덕궁과 이왕가는 조선총독부의 통제에 있었으며, 작품 구입은 총독부의 지시와 압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대부분의 작품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이 중 일본화는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등을 망라하고 있지만 그 내용의 실상을 보면 그리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물화는 대부분 일본인 여인·어린 아이·무사 등 인물의 모습을 세필로 그린 것이며, 조선의 모습을 그린 것은 쓰치다 바쿠센(土田麥僊, 1887-1936)의 <기생의 집> 초본과 완성본 2종과 미와 조세이(三輪晁勢, 1901-1983)의 <저자길(街)> 등 3점뿐이다.
미와 조세이 <저자길(街)> 쓰치다 바쿠센 <기생의 집>
산수·풍경을 그린 작품들은 대부분 자연의 아름다운을 묘사한 것으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신남화 풍의 그림이 많다. 조선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은 히라후쿠 햐쿠스이(平福百穗, 1877-1933)의 <한가로움(長閑)>과 사쿠마 데츠엔(佐久間鐵園, 1850-1921)의 <금강산의 가을> 두 폭 대련 등 2종뿐이다.
히라후쿠 햐쿠스이 <한가로움(長閑)> 요꼬야마 다이칸 <정적(靜寂)>
화조·영모는 모든 작품이 전형적인 일본화 형식의 화조·영모 등의 채색화이다. 일본 미술이 추구하는 극단적인 절대미를 보여주는 현실과는 괴리된 탐미적·장식적인 작품일 뿐이다.
창덕궁 소장으로 지금은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화는 34점인데, 34점 모두 일본식 채색화 또는 화조·영모이거나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 평범한 산수화들이다. 어느 한 점 조선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 없다.
이들 작품 100여점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박물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화가가 그린 동양화 형식의 그림 대부분이다.
이들 그림은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면면이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또한 실제 조선 지역에서 활동하고, 미술계를 지탱하고 유지해온 작가들의 작품으로 대표될 수 없다. 당시 현실과는 상당히 괴리되어 있는 불편한 작품들이다. 오히려 지배를 당한 우리 민족의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보여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괴물들이다. 당대 저명한 일본 화가들이 그린 화려하며 호화스러운 그림의 면면은 당시 우리 민족의 서글픈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 수준 높은 당대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수모를 겪은 우리민족의 슬픈 현실 탓이다. 순수한 창조적 미감을 담은 작품이 아니기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수집품들에게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제국주의 침략의 가해국인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수집품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침략의 유물이지만, 피해국인 우리에겐 불행하기 짝이 없는 치욕의 역사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박물관에 소장할 작품을 외부의 강요에 의해 구성할 수 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기억이다.
둘째, 강요에 의한 수집(매입)이라 제국주의 목적에 따른 작품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략을 정당화 하려는 도구로서의 내용을 가진 작품들이다. 일본의 화려함, 일본 무사의 강인함을 강조하거나 일본 특유의 화려한 색채감의 화조, 또는 당시에 일본에서 유행하던 몽롱체 형식의 신남화풍 그림들이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이유로 1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가해국인 일본의 입장에서는 강자의 완력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느껴 세상에 드러내는데 한 치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제국주의에 강점을 당해 폭압을 당한 피폐한 조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미술품들은 민족적 반성의 자료도 되지 않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다. 더욱이 세상에 자랑스러운 듯 내보이는 것은 깊은 상처에 소금뿌리는 격이다. 진퇴양난이다.
노다 규호 <잇규선사(一休禪師)> 하시모토 간세쓰 <정벌하러 떠나다(卦征)>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일본화들은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서 지난 100여년의 세월을 기념하며 세상에 소문내며 공개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다.
4. 태생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제안
현재 고궁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된 일본화들은 당시 최고 수준에 있었던 작가들이지만 개화기에서 일제강점 36년에 이르는 반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기엔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들이다. 당시 총독부, 이왕가, 창덕궁 등에서 사들였지만 이 들 작품이 대부분 조선에서 그려진 것도 아니며, 조선의 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조선에 거주하는 화가들의 작품도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화가들이 조선미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는 하지만 일본에 거주하며 잠시 경성에 출장 와서 심사하며 찬조출품 하거나 조선미전과 상관없이 국가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전람회에 전시되었던 작품을 매입하였던 것이다. 실제 조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고 조선에 애정도 없는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이 문제이다.2)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살며, 조선의 현실을 소재로 삼고, 조선에서 행해지는 행사와 국민들을 위한 목적으로 그린 작품들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를 중심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작가와 작품들은 몇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① 조선에 거주하며 화가로서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
② 조선미술전람회, 공진회 등에 출품한 작가들의 작품
③ 조선의 산야나 명승고적, 인물을 그린 작가들의 작품
④ 조선을 여행하러 왔다가 느낌을 기록하듯 그린 작가들의 작품
⑤ 조선인과 일본인이 교류하며 남긴 작품
이 범주 속한 작가들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을 중심으로 탐색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당시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활동한 전람회이며 당시 유일한 관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림에 뜻을 둔 일본인들은 조선미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조선미전에 심사하러 왔던 심사위원은 조선을 여행하며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때로는 자신의 친구나 제자들과 함께 와서 전국을 돌며, 사생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금강산은 일본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그 열망은 가히 ‘열풍’이라 할 만하였다.
현재 전하는 일제강점기에 그린 작품들이 너무 일본적인 것들로 편중되어 자랑스럽지 못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조선의 인물·풍속 등을 배경으로 한 작품과 금강산을 중심으로 조선의 자연을 예찬한 작품을 모아 당시의 미술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데, 그동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은 일정 부분 국립박물관·미술관의 잘못도 크다. 해방이 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자 일본과 관련된 것은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동안 박물관의 일본화들이 60여년을 수장고에 숨어 있었듯이 박물관 관계자 그 누구도 일제강점기에 발표되었던 작품을 수집하는데 나서지 않았다. 기관에서 사들였던 작품의 소재조차 관리가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일본과 관련된 것은 모두 사악한 것이 되어 버려지고, 또는 다른 작가의 이름으로 변조되어 팔리기까지 하였다. 아직도 세간에는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작품들이 제법 있으며, 비교적 낮은 가격에 떠돌고 있다.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작품들이 시장이나 경매를 통해서 매우 낮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더 없어지기 전에 정책적으로 수집하는 계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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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구열 <국립중앙박물관의 근대미술콜렉션>, 「일본의 근대미술-일본화편」2001, 국립중앙박물관 175쪽
1) 이구열 <국립중앙박물관의 근대미술콜렉션>, 「일본의 근대미술-일본화편」2001, 국립중앙박물관 175쪽
2) 오히려 조선미전에 심사 참여하거나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작가이므로 식민지인 조선미술계에 지도적 역할로서 교육적 기능을 한 것이 역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