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한 월간지 『신천지』는 1946년 3월호(통권 2호, 제1권 2호)는 3·1운동을 특집기사로 다루었다. 이 가운데 신천지 기자의 「위창선생방문기」는 특별한 내용은 없어도 “끊어질 뻔하였던 조선의 산 명줄”, “선생께서 몸소 이어주신 조선의 거룩한 목숨” 등의 표현을 통해 당시 민족사회에서의 오세창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고어투를 살리고자 했으며 한자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한글로 바꾸었다.)
기미운동(己未運動)의 선구자(先驅者) 위창선생방문기(葦滄先生訪問記)
본지기자, 『신천지(新天地)』 통권 2호(제1권 제2호), 서울신문사, 1946. 3
기자의 임무는 위창 오세창 선생 댁에 방문하여 선생께 기미운동의 회고담을 듣고 오는 것이다. 선생은 누구나 아다 시피 기미년 독립운동의 대선배이시며 삼천만 우리 민족이 다 같이 앙망(仰望)하여 마지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나이 어리기 때문에 기미해의 만세운동을 제대로 겪지 못한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를 대신하여 기자는 선생께 직접 몸소 겪으신 이야기를 들음으로서 그 당시의 비분을 다시 한 번 흐느끼고 그 당시의 조선천지를 뒤흔들던 만세성(萬歲聲)을 다시 한 번 엿듣고자 함이었다.
도 1) 『신천지(新天地)』 통권 2호(제1권 제2호, 서울신문사, 1946. 3)의 기사 앞 면.
익선동(益善洞) 좁은 골목을 휘돌아 선생 댁 번지를 찾으면서 설레는 기자의 마음은 멎는 듯이 옛 일을 생각하였으며 또한 깨닫듯이 발길을 재촉하곤 하였다. 좁다란 익선동 골목은 예대로 길이 좁고 눈 녹는 봄철 골목길을 기자는 즐겁고 그리운 마음으로 걸었다. 이내 뵈올 그리운 선생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리하여 얼마 후에 찾은 집은 뜻밖에도 적은 집이었다. 좁은 샛골목 안의 옹색하게 끼어 있는 열 간 남짓한 집이다. 기자가 래의(來意)를 고하니 젊은 자제분이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은 방금 천도교(天道敎)에 가시고 집에 안계시다 한다. 언제쯤 들어오시겠느냐 물으니 저녁 안에 들어오실 것이나 자기 가친께옵서는 일절로 기자를 만나시기길 싫어하시고 더구나 삼일운동에 관하여선 아무에게나 이야기 하신 일이 절대로 없으시니 단념함이 좋을 것이라 한다.
도 2) 오세창, <용상(龍象)>, 종이에 묵서, 17×46㎝
이에 실망한 기자가 어떠한 연고인가 반문하니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듯이 여지껏 여러 군데에서 오신 분들이 한 번도 듣고 간 이가 없다는 것으로 말을 맡는다.
그렇다고 그냥 단념하여 버릴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러면 내일 하여튼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는 뜻을 말하고 그날은 그냥 돌아왔다. 그 이튿날 아침에 가니 안계시다 하고 오후에 또다시 간즉 아직 역시 안 들어 오셨다 한다.
그러나 기자의 임무는 오직 선생을 만나 뵈옵는 일이니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을 차리고 그 이튿날 아주 느지막하게 찾아 갔었다. 하두 자꾸 찾아가니 젊은이는 민망하였든지 지금 계시기는 하니까 하여튼 그러면 들어와 뵈옵기나 하여 보라고 기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 3) 오세창, <전서육곡병(篆書六曲屛)>, 1923년, 비단에 묵서, 125×38×(6)㎝
인도하는 대로 거는 방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앉으니 선생께서는 조금도 반기는 기색이 없이
“무엇하러 왔니”
하고 곧 화를 벌컥 내시며 물으신다.
“네, 제가 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에 잡지부에서 삼일운동 특집호를 내는데 선생님께 회고담을 들으러 왔습니다.”
하고 기자는 공손히 머리를 굽혔다.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자의 제 육감(六感)은 벌써 이번 방문이 실패이라는 것을 직감하였으나 그래도 혹시 하는 일루의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은 다시 언성을 높이시어
“삼일운동 이야기는 안한다. 안한다는데 왜 성가시게 찾아오니. 삼일운동 이야기뿐이 아니다. 내 몇 십 년 째 두고 신문이나 잡지에 내 이름나는 것을 네 보았니.”
도 4) 오세창, <묵란>, 1937, 종이에 먹, 20×45㎝
하고 이번에는 눈을 크게 뜨시고 기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신다. 나도 선생의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로 27년 전의 투사의 얼굴이시다. 결결하신 성미는 주름 잡힌 얼굴에 아직껏 빛을 잃지 않으시고 더구나 선생의 쏘는 듯한 안광(眼光)은 기자로 하여금 능히 거절키 어려웠다. 기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머뭇머뭇하다가
“제가 이렇게 여러 번 댁에 찾아온 것은 단지 삼일운동에 대한 말씀만을 듣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 문안도 여쭐 겸 온 것이니 선생의 존안이나 뵈옵고 잠간 앉았다가 가겠습니다.”
하니 그러면 마음대로 하라시는 듯 선생께옵서는 다시 기자를 상관치 않으셨다.
도 5) 오세창, <열수오세창인신(冽水吳世昌印信)> 도 6) 오세창, <만인여해독관비(萬人如海獨關扉)>
선생께옵서는 묵묵히 앉으시어 혹은 서랍에서 붓 상자를 꺼내시어 붓털을 가다듬어 보시기도 하고 혹은 가지각색 옥돌로 새긴 낙관용 도장이 가득 찬 궤를 꺼내서 고르시다가 문득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이번에는 퍽 자상하신 음성으로 기자에게
“너의 집이 어디냐”
고 물으신다. 여기에 힘을 얻은 기자는 솔깃하고 귀를 기울였으나 또 다신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도장 궤를 닫으신다. 간반방(間半房) 안에는 진귀한 일상용구가 선생의 손으로 규모있게 자리 지이고 사방벽면에는 보기 드문 옛 서화류가 오밀조밀 걸렸다. 이것으로 미루어 결결하신 듯이 보이는 선생의 성격의 한모에는 규모 있고 자상하신 군데가 섞여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선생과 이렇게 잠시를 같이 앉아 있는 동안에 기자의 마음은 다시 선생을 괴롭히기를 거리끼었다.
도 7) 미군정으로부터 옥새를 인수받는 오세창(1946. 8.15)
이 분이 바로 기미년의 위대한 독립운동을 일으키신 분이다. 지금 기자 앞에서 붓털을 가다듬고 앉아 계신 바로 이분이 27년 동안 왜적의 끊임없는 압제 밑에서도 여전하게 꿋꿋이 살아오신 분이다. 기자는 다시 한 번 선생의 주름 잡힌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기나긴 왜적의 압제 밑에서 비로소 해방된 오늘에 있어 생각컨데 그 곤란한 27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오신 선생은 바야흐로 끊어질 뻔하였던 조선의 산 명줄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께서 오늘 굳이 입을 닫히심은 무슨 까닭인지 기자의 능히 알바 아니지만 이제 또 새삼스러이 선생께 말씀을 들으면 무엇하리. 기자는 다만 이렇게 선생의 역역한 음성을 들음으로서 만족히 여겼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이 젊은 우리들로서 선생을 대함은 마치도 잊을 뻔하였든 조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요. 끊이지 않는 우리들의 혈연을 새삼스럽게 또 깨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기자는 선생께 치사(致謝)의 말씀을 드리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문밖까지 따라 나온 아드님께 선생의 춘추가 여든 셋이라는 것과 선생의 기력이 안녕하시다는 말을 듣고 기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골목을 나섰다. 선생께서 몸소 이어주신 조선의 거룩한 목숨을 양 어깨에 힘껏 받아 짊어지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