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엽(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건국대 학술연구교수)
다산진장부전多山珍藏附箋
1930년대는 고미술품 거래가 대단히 활성화된 시기로서 박영철과 같은 이름 있는 수장가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고미술품을 수장할 수 있었다. 박영철의 수장품은 경성제대에 기증한 115점 외에도 훨씬 다양한 종류에 많은 수효의 고미술품을 수장하였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 증거가 치밀한 그의 성품대로 수장 작품에 붙여 놓았던 ‘多山珍藏附箋’이다.
1930년대는 고미술품 거래가 대단히 활성화된 시기로서 박영철과 같은 이름 있는 수장가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고미술품을 수장할 수 있었다. 박영철의 수장품은 경성제대에 기증한 115점 외에도 훨씬 다양한 종류에 많은 수효의 고미술품을 수장하였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 증거가 치밀한 그의 성품대로 수장 작품에 붙여 놓았던 ‘多山珍藏附箋’이다.
<박영철 부전>, 종이, 8×6㎝, 개인 | <박영철 부전>이 붙어 있는 <일호一濠 남계우南啓宇 병풍> 제첨 부분 |
부전은 “서류(書類)나 문건(文件)에 간단한 의견을 써서 덧붙이는 쪽지”로서 전체 소장품의 내역과 수효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박영철의 부전지는 ‘품명’, ‘번호’, ‘구입’, ‘전소지자’, ‘비고’의 네 항목으로 되어있는데, 이 부전은 품명에 ‘一濠蝶屛’이라 되어 있어 조선후기의 화가로 나비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호一濠 남계우南啓宇(1811-1890)의 나비그림 병풍에 붙어 있다. 임신년은 1932년으로 그의 나이 53세 때이며 비고에는 백문방인白文方印 ‘박영철인朴榮喆印’과 주문방인朱文方印 ‘다산多山’이 찍혀있다. 번호가 155번으로 된 것으로 미루어 1932년 당시에 이미 최소 155점 이상의 미술품을 수장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경성제국대학 전경
고미술품 수장가의 유형
필자는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수장품 방식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① 수장하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유형(전형필), ② 수장품이 조금씩 유출되다가 모두 흩어진 유형(장택상, 손재형), ③ 다량 수집했다가 한꺼번에 모두 처분해 버리는 유형(박창훈, 이병직), ④ 수집한 고미술품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량 몰수 또는 강탈당한 경우(함석태)로 구분한 바 있다. 다만 ③에서 박창훈의 경우가 경제적 이득의 극대화가 목적이었는데 비해, 이병직의 경우는 교육에의 투자라는 공익적 기여가 더욱 컸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수장품 처리방식 만으로 본다면 박영철은 세 번째 유형 가운데 이병직의 경우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 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마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로서 그리고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증이 밑거름이 되어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설치된 점은 더욱 뜻 깊은 일이다.
박영철이 그의 나이 42세 때인 1921년에 간행한 『백두산유람록』의 표지. 이완용이 썼다. | 『백두산유람록』에 실려 있는 용왕담龍王潭(백두산 천지天池 사진) |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박영철이지만 그는 '전천후 친일파'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철저한 친일행각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친일행각은 신념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기회주의적인 친일과 구별된다.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문명개화론을 신봉하였고 대동아공영이라는 일제의 이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제국주의와 친일파 연구에 의하면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협력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기득권 유지와 개인적 영달을 위해 제국주의 세력에 협력하는 자와 중간계급이나 지식인 같은 '주저하는 협력자' 혹은 '반항하는 협력자', 그리고 단순한 기회주의자가 그것이다. 1910년대 친일지식인들이 내세우던 산업진흥론은 일본인과 같은 수준이 되기 위한 '동화주의적 실력양성론'인 반면,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은 신지식인층의 실력양성론은 비록 먼 훗날의 것이나마 '독립'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전자를 '적극적 협력자', 후자를 '주저하는 협력자'라는 구별을 하고 있다. 박영철은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은 신지식인층이지만 '주저하는 협력자'가 아닌 '적극적 협력자'의 범주에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영철의 자서전, 『50년의 회고』(1929)에 수록된 박영철의 사진들.
오른쪽 위부터 동경유학 당시(22세), 오른쪽 아래 대한제국 시종무관 당시(31세),
왼쪽 위 강원도지사 당시(46세), 왼쪽 아래 양행洋行(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대회 참관을 위해 3개월에 걸쳐 중국, 유럽, 인도 등 각국 시찰) 당시(50세) 모습.
박영철의 서화수장은 일차적으로 한시와 서화 등을 좋아하고 즐겼던 그의 성정에 의한 바 크지만, 과거 조선의 문화예술적 유산과 전통에서 고유의 특성을 찾고 이를 통해 '동양의 세계사적 의무'인 '동양적 근대'를 창출하고 구현하기 위해 담론화된 동양성=조선성을 추구한 일본의 대동아주의와 같은 궤를 걸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기의 조선적인 특성 곧 '반도색'은 동양의 비서구적 원천으로서 전통미술에서 고유의 특성을 찾으려 한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시책에 의해 추구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박영철의 서화수장 등 민족문화 애호는 그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본의 대동아주의 시책과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이 방면 연구에 시사하는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