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의 출세비결은 일제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3․1운동 당시 그가 쓴 '만세망동론萬歲妄動論'에는 조선독립 불능론과 당시 친일파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고 있던 실력양성론 등은 그의 출세지향주의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친일파들이 당시 주장하고 있던 실력양성론은 박영철이 『매일신보』, 1919, 4, 30일자에 쓴 「이번 소요에 대하여」에 잘 드러난다.
일제시기의 경성제국 대학 전경. 박영철 사후 1년 뒤인 1940년에 '고박영철기증서화류' 기증전시가 이루어졌다.
이번에 소요에 부화(附和)한 자의 다수는 주동자의 선동에 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이미 승인함과 같이 믿어서, 최초는 단순히 만세를 불러서 환영의 뜻을 표함에 불과하였던 것이, 점차 파괴성을 화化하여 감히 폭행을 행하기에 이르렀음은 가장 유감이라. 그러나 강화회의가 종료하고 독립의 진위(眞僞)가 판명하게 되는 때에는 그들도 골계(滑稽)의 느낌이 저절로 생길 것이라 생각하노라.
조선인이 맨손으로써 독립만세를 부른들 무슨 효과가 있으리오. 이와 같이 성산이 없는 운동은 무모요, 생명․재산은 손상하고 장래 악영향을 입을 뿐이라. 또한 한걸음 나아가서 설사 일본이 독립을 승인한다 할지라도 금일의 재정, 병력, 기술, 기타에 한 나라를 지탱해 갈 능력이 있는가. 구한국의 악정의 상태로 돌아갈 뿐 아니라 러시아의 현상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빠질 뿐이니, 그 이해를 분별치 못하는 이번의 소요는 그 의미를 해석하기에 곤란․고심하는 바이라.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정의 안전 또는 교육․민업의 발달은 구한국 정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누구든지 이의가 없을 줄로 생각하며, 내선인의 차별이 신정의 결점이라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정도 문제로 선인의 정도가 향상될수록 대우도 향상하여 결국 내선인이 같은 정도가 되면 권리․의무에 자연 차별이 없을 것은 내지조야 유식자의 희망하는 바이요, 신문․잡지 기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우리 동포는 속히 학문을 닦고 돈을 저축하고 인격을 높게 하여, 이로써 내선동체가 되어 세계에 설 것을 간절히 희망하노라.
정선, <만폭동>, 비단에 수묵, 33.2×㎝, 박영철 경성제국대학 기증 / 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편 박영철은 전통문화애호가, 서화수장가로서도 유명하였다. 잡지 『三千里』 1937년 5월호에 게재된 좌담 「財界 巨頭가 '돈과 사업'을 말함 - 諸氏 韓相龍, 閔奎植, 金基德, 朴興植, 朴榮喆 5氏」에서 "늘 우리의 고문화를 보존하고 그 산일(散逸)을 막는 의미에서 고문서화를 중심으로 박물관 같은 것을 만들 생각을 가졌으나 구체화한 것은 아니"라고 밝힌 것을 보면 그의 서화수장은 단순한 수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박물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짐작된다. 그는 자신의 취미를 "오직 고서화와 시 짓는 것"이고 "고화(古畵)를 완상할 때나 시석(詩席)에 앉아 청풍명월을 읊을 때는 속세의 모든 괴로움이 저절로 사라져 심히 유쾌하다"고 할 정도로 고서화와 시 등 전통예술을 생활화하였다.
1913년 10월 17일 경성부 가회정 93번지 '한상룡 저택'에서 찍은 기념사진.
한상룡(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을 비롯, 데라우치 마사다케(앞줄 오른쪽 여섯 번째) 조선총독,
야마가타 이사부로(앞줄 오른쪽 일곱 번째) 총독부 정무총감 등의 모습이 보인다.
아래는 현재의 사진.
한상룡의 옛 집은 최익선을 거쳐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가 사들인 후
백인제 박사의 후손이 관리하여 오다가 2009년에 서울시의 소유가 되었다.
현 서울시 민속자료 22호 ‘백인제 가옥’으로서 새로운 서울시장 공관으로 결정되어 2013년부터 사용될 예정이다.
소격동 그의 집에도 병풍 '백세청풍(百世淸風)', 추사 김정희의 '계산무진(溪山無盡)', 오세창의 '다산시좌(多山詩座)' 등의 글씨와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고 외국의 저명인사에게 보이는 조선 사람의 집으로 대표적 친일 경제인으로 이완용의 외조카인 한상룡(韓相龍)과 박영철의 집을 '표본격'으로 소개했다는 것으로도 그의 부와 풍요로운 삶이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