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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7. 박영철: 배정자와의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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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철의 이름이 일반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한 ‘한말의 요녀(妖女)’ 배정자(裵貞子: 1870-1951)와의 동거 스캔들이다. 이 스캔들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박영철은 시종무관 자리를 두 달 만에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박영철 자신도 나중에 "일생 잊을 수 없는 통한사(痛恨事)"라고 할 정도로 부끄러워한 사건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배정자 항목은 다음과 같다. 

이규웅 감독, 김지미·김진규 주연, 영화 <요화 배정자> 포스터, 1966


민족반역자. 첫 이름은 분남(粉南).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아버지가 민씨 일파에게 처형된 뒤 죄적(罪籍)에 올라 어머니를 따라 유랑생활을 하다가 1882년 여승(女僧)이 되었다. 1885년 아버지의 친구이며 밀양부사인 정병하(鄭秉夏)의 도움으로 일본에 도피하여 망명중이던 안경수(安駉壽)·김옥균(金玉均) 등에게 의탁하였다. 일본에서 정자로 개명하였고 1887년 이토(伊藤博文)의 양녀가 되었다. 이토로부터 수영·사격술·변장술 등 철저한 밀정교육을 받았다. 한편 사상적 세뇌를 받고 1894년에 귀국하여 일본세력의 비호를 받고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반민족적인 부일(附日) 앞잡이노릇을 하여 우리나라의 국권박탈을 위한 막후인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아카시(明石元二郎)의 앞잡이로서 한민족 탄압에 앞장섰다. 1920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였을 때에는 봉천(奉天: 지금의 瀋陽)총영사관 촉탁으로 만주·시베리아를 왕래하며 군사첩보자로 활동하였다. 특히,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는 수완이 컸다. 그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지령을 받고 간도·상해 등지에서 항일독립투사를 붙잡는 앞잡이노릇을 하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하여 친일반역자로 붙잡혔다.


정인엽 감독, 신성일·윤정희 주연, 영화 <신 요화 배정자> 포스터, 1972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광으로 남편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군인인 현영운(玄暎運: 1868-?)을 출세시켰으나, 현영운이 실각하자 이혼하였다. 배정자를 눈 여겨 보던 박영철은 고향의 본처를 둔 채 배정자에게 접근하여 5년간 동거하였다. 박영철과 동거한 배정자의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은 유명하다. 


1920년대 만주에서 밀정으로 활동할 당시의 배정자.
50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세련된 모습이다. 


  언론인이자 친일연구가인 정운현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특별기획-미리 보는 친일인명사전]의 다섯 번째로 쓴 "이토 히로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하리'  여자밀정 '요화' 배정자"의 박스기사에서 배정자의 남성 편력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한국침략의 원흉으로 배정자를 양녀 겸 애첩으로 삼았던 이토 히로부미(마차 왼쪽에 앉은 사람)가
'을사조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 29일 일본정부의 칙사로 경성역(현 서울역)에 도착해 마차에 오른 모습.
그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당시 한국주재 일본군사령관(육군대장)으로 나중에
제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1916. 10~1919. 08)이다.



그의 '첫 남자'는 전재식(田在植). 한때 관기(官妓)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 결혼을 하였다. 이 사이에서 전유화(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 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 만에 육군 참장(종2품. 현 준장)임任농공상부 협판(차관)에 올랐다. 한편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량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박영철(朴榮喆. 일본육사 15기 졸업. 함북도지사. 중추원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배정자는 일본인 오하시(大橋), 은행원 최(崔)모, 전라도 갑부 조(趙)모, 대구 부호의 2세 정(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글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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