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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6. 박영철: 친일, 풍류 그리고 배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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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철의 친일행각이 이른바 ‘생계형 친일’의 단계를 넘어선 신념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문명개화론에 입각한데다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라는 일제의 이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근대화를 추구하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중국과 조선의 후진성을 멸시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일본인에게 아시아의 지도자라는 의식을 고취시키고 미개한 아시아를 지도하기 위해 지배해야 한다는 '동아맹주론(東亞盟主論)'으로 표현되었다. 박영철은 1919년 동경에서 쓴 「내선융화책 사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본래 조선인은 이렇게 무능하기 때문에 자립할 수 없었고, 선진 이웃 일본인의 지도를 바라서 반만년의 전통적 문화를 가진 2천만의 민중을 들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인은 조선인의 만족스럽지 못한 점을 책하기 전에 그 지도·개발의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고종 시종무관 시절의 박영철(28세, 1907년)

당시의 잡지류 기사에 박영철에 관한 신변잡기적 기사가 게재되어 있는데, 이 기사류는 잡다하고 경박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평과 의식구조, 취미, 외모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박영철은 자신의 일생에서 "사관학교 마친 후 말 타고 호령하던 시절이 가장 득의(得意)의 시절"이라 한 것으로 보면 철저한 군인정신을 가진 인물로만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풍류 넘치는 삶을 살다간 인물이기도 하다. 백두산, 아시아, 유럽 등 당시로서는 드물게 다양한 여행을 하였고 저술 작업도 활발하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 『아주기행(亞洲紀行)』(1925), 『구주음초(歐洲吟草)』(1928), 『오십년의 회고』(1929), 『다산시고』(1932) 등 한문과 일어로 된 다섯 권의 저서를 남겼다.


박영철의 「백두산 여행기」가 실린  1919. 9. 5일자 『매일신보』

서울 소격동 144번지의 일식과 양식이 절충된 대저택에 살았던 박영철은 "재계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꼽히며 한시도 잘하며 산수화 등 그림도 애상(愛賞)"하였고 연회(宴會) 개최하기를 즐겨하였으며 바둑, 골프 등에도 취미가 있었다. 조선총독부 측에서도 "무게 있고 겸결(謙潔)하다고 본" 인물로서 "국장급들이 즐겨 함께 술을 나누는 친구로서, 청촉(請囑: 청을 들어주기를 부탁함)이 없고 청렴"했다는 평을 들었다는 총독부 출입 기자단의 언급으로 미루어 점잖으면서도 공사가 분명한 행동거지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풍채는 비대하여 '뚱뚱보'의 하나로 꼽혔고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서구(李瑞求)가 '코끼리 상(相)'이라 평할 정도였다. 영화배우로 유명한 복혜숙은 "스타일이야 굴곡이 별로 없고 두리둥둥 대들보 같고 이마 벗어지고 묵신하고 거인미(巨人美)가 있다고…아기자기한 미와는 천리상거(千里相距)지"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바 있다.


'한말의 요녀'라 불리는 배정자(1870-1951)

그는 원만한 성품을 가졌다고 주변에서 평했지만 대단히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절대 남에게 현금을 주지 않았고 월말 가계가 조금만이라도 틀렸을 경우에는 밤을 새워서라도 맞출 정도로 치밀하였다. "주소도 144, 전화번호도 144, 자동차번호도 144"로 하고 명함에 자신의 6개나 되는 기다란 직함을 빠짐없이 나열한 것으로 보면 치밀함을 넘어 일종의 결벽증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35년 당시 개인소득액으로 따지면 그는 민대식, 임종상, 민규식, 전형필 등에 이어 11위에 올랐고, 그가 총독부 학무국장실에서 졸도하여 돌아갔을 당시 그의 유산은 약 백만 원 내외로 추정되었다.


박영철과 배정자의 스캔들 기사. 1925. 8. 21일자 『동아일보』

사실 박영철의 이름이 일반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한 ‘한말의 요녀(妖女)’ 배정자(裵貞子: 1870-1951)와의 동거 스캔들이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2.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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