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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4. 박영철: 친일의 조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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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지사 시절의 박영철(46세, 1925)


박영철은 그의 나이 50세 때인 1929년에 간행한 『五十年の回顧』에서 자신의 조상은 양반이었고, 아버지는 아전, 자신은 평민이라 하였다. 군인으로 출발하여 관리를 거쳐 실업계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그는 봉건시대의 신분사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자신이 살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간 일제강점기를 신분상의 귀천이 없는 평등한 시대로 평가하였다. 그는 당대의 민감한 사건을 언급할 경우에도 일제를 두둔하였음은 물론 적극적으로 일본의 문물을 찬양하였고 조선에 대한 관점 역시 일제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서전 『五十年の回顧』를 굳이 일본어로 서술하고 자신의 경험보다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비판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할애한 것을 통해 그의 친일적 시각을 알 수 있다. 


박영철이 그의 나이 50세 때인 1929년에 간행한 자서전 『五十年の回顧』(京城, 大阪屋號書店).
현대의 인쇄에 비교해도 조금의 손색이 없는 초호화 장정으로 되어 있다. 


박영철이 근대교육을 받고 일제치하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기본 원인으로는 중인들이 양반들에 비하여 근대 문물에 대한 저항감이 적었고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훨씬 빨랐던 데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중인들은 기존의 왕조체제에 대한 집착이 양반계층에 비하여 훨씬 적었고, 역학(譯學)·의학(醫學)·산학(算學) 등에 종사하는 그들의 직능은 근대라는 시대에 적합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지사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가 그의 문집인 『해학유서(海鶴遺書)』에서 양반의 자제들이 근대식 교육을 받으려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근대식 학교로 바뀐 향교에는 향리나 장교의 자제만이 수학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정부의 중요한 직임은 모두 이들이 독점할 것"이라 개탄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지적이다.


일본 정부의 현직 육군대신 자격으로 통감에 부임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행렬(1910. 7. 23).
데라우치는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통치를 지휘했다.
사진은 서울의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으로 추정된다


1890년대 관비유학생의 상당수가 친일화된 이유를 이들이 본래 관료지향적 성격이 강했고 유학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옅어지면서 상당 부분 친일화 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냉대를 받은 뒤에 통감부 설치와 함께 출세할 수 있었던 사정 등에 의해 대부분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박영철의 경우도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박영철이 가졌던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에 대한 반감은 근대화된 일본사회와 일본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한 일본군의 위용은 그를 더욱 친일적 경향으로 경도되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친일적인 정치세력의 육성은 개항 이래 일본의 대한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학생들이 일본의 정책에 포섭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편집 SmartK
업데이트 2024.12.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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