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에 박영철은 군부(軍府)대신과 고종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일본 육사 제11기 생인 노백린(盧伯麟:1875-1926, 독립운동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박영철은 대부분의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의 경우처럼 대세에 순응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조선보병대의 일본 육사출신 한국인 장교들은 일본 군인과 동등한 대우는 물론,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커다란 배려와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의 순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영철의 고위관료로의 입신과 기업인으로의 변신과 성공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것에 힘입은 바 크다.
고종 시종무관 시절의 박영철
박영철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을 비난하는 글을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썼다. 이 공로로 인하여 도 참여관을 거쳐 도지사까지 승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근대사 연구자(박은주)의 평도 주목할 만하다. 참여관은 일제시기에 도장관(1919년 이후에는 도지사)이 독재 또는 독단적인 운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각 도에 1명의 참여관과 3명의 참사관을 두었다. 참여관은 장관의 자문에 응하고, 임시령을 받아 도청의 사무를 행하는 자로 되어 있으나 참여관 회의가 개최된 것이 3․1운동 직후 단 한 번 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해 실권이 없는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북도 참여관 박영철의 「도평의회 회원선거에 대하여」, 잡지 『조선』, 1924. 3월호
1920년 9월에는 서울에서 반독립, 친일 여론의 조작과 선전 유포를 목적으로 한 친일단체인 국민협회를 민원식(閔元植)․정병조(鄭丙朝) 등과 설립하고 일선동화(日鮮同化)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였고, 1924년에는 강원도 지사, 1926년에는 함경북도 지사를 지냈다. 1926년에는 일본의 요시히토 천황(嘉仁天皇: 1879-1926)이 죽자 장례식 칙임관 자격으로 동경에 가서 의식에 참여하였다. 1929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후 조선 상업은행과 여러 공기업의 주요 간부를 지냈다.
「만주국 초대 명예총영사 박영철 임명」, 『매일신보』, 1937. 4. 22 |
「만주국 명예총영사 박영철씨 피명(被命)」, 『흥아협회보』, 1937. 5 |
박영철은 1930년대에 이미 민영휘(閔泳徽), 최창학(崔昌學) 등과 함께 거부로 이름이 났고, 민대식(閔大植)과 함께 '반도의 은행왕(銀行王)'으로 불렸다. 1933년에는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책으로 친일유지나 ‘귀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며,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1939년에 뇌일혈로 죽자 일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훈(勳) 3등 욱일중수장(旭日重綬章)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