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의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다산(多山)이다. 박영철의 생애는 그의 나이 50세 때인 1929년에 회고하며 쓴 『五十年の回顧』를 통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박영철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본래는 양반이었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그의 부친 박기순(朴基淳: 1857-1935)대에 이르러서는 평민과 다름없는 영락한 처지가 되었다.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박기순은 미곡상으로 돈을 번 후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삼남은행장(三南銀行長), 중추원 참의(參議), 조선농회 통상위원 등을 지냈다. 박기순은 1931년 4월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에 이미 "만석군의 이름을 들은 지 벌써 10여년"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1920년 즈음에 이미 거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 유학 당시의 박영철(22세, 1901년)
박영철은 7세에서 15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나중에 그가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의 소양은 이 당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박영철의 일생의 전환점은 그의 나이 19세(1898)에 전주의 삼남학당(三南學堂)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그 다음해인 1900년 4월에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일본 유학을 간 것이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고베로 간 박영철은 고베에서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만난 후 오사카를 거쳐 동경으로 갔다.
박영철의 일본 유학은 구한말 조선의 일본 유학생 파견은 김홍집․유길준․박영효․서광범 등으로 구성된 개혁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유학생 파견사업 덕분이다. 유길준은 신사유람단, 김홍집과 박영효는 수신사로서, 서광범은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 등으로 일본에의 체류경험과 유학생들과의 접촉이 있었다. 유학생 파견 사업은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중단되기도 했지만 꾸준히 추진되었다. 개혁정부의 구성원들이 개화파이고, 이들은 직․간접으로 유학생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한 것으로 여겨지며, 아울러 일본 측의 강력한 유학생파견 권고도 주효했다.
일번 동경 세이죠오학교 유학시절의 팔형제배
앞줄 왼편 두 번째부터 김기원, 박두영, 박영철, 유동열, 뒷줄 중앙이 이갑
박영철은 당시 육군장교를 양성하는 예비교로 명성이 높았던 동경의 사립 세이죠오(成城)학교에 입학하였다. 세이죠오학교에 재학하던 박영철은 관비(官費)장학생으로 1902년 12월에 일본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 졸업한 제15기생의 8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제15기생들 가운데에는 사비생(私費生)도 있었으나 러일전쟁에 함께 종군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등 다른 기에 비하여 단결의식이 강하였기 때문에 흔히 '팔형제배(八兄弟輩)'라 일컬어졌다. 이른바 팔형제배는 보병과의 김기원(金基元), 김응선(金應善), 남기창(南基昌), 이갑(李甲), 기병과의 유동열(柳東說), 박영철, 포병과의 박두영(朴斗榮), 공병과의 전영헌(全永憲)이다.
대한제국시대 팔형제배의 가족사진
뒷줄 왼편부터 김응선, 유동열, 남기창, 박두영, 박영철, 김기원, 전영헌, 이갑
이들은 한말 육사 유학생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행운아로 불렸으며 한말의 무관양성소인 무관(武官)학교, 연성(硏成)학교, 유년학교에 대거 진출하였다. 일본 육사 졸업 후 도쿄근위사단에 배속되어 견습사관 생활을 하던 도중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종군하여 원수부(元首府) 관전장교(觀戰將校)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어 각 전선을 자유로이 시찰할 수 있었다. 이들이 전선시찰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하자 출세 길이 열렸고 당시 근위사단장이던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대장으로 진급하여 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오자 그들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