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10대가 산수풍경화전」 사고(社告), 『동아일보』, 1940년 5월 23일.
‘10명의 비장가 찬조출품’ 명단에 전형필, 장택상, 김덕영, 함석태, 한상억,
이병직, 손재형, 김명학, 박상건, 오봉빈 등 10명이 나열되어 있다.
우리나라 근대의 미술시장과 수장가에 대한 연구는 현대 미술계의 형성과 구조의 파악과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중요성을 갖지만,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이 10여년에 불과하고 연구자와 결과물의 수효 역시 많지 않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 역시 거대 담론과 함께 구체적이고 정밀한 접근이 요청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득신, <신선도>, 『조선고적도보』 제14책, 도 5975, 이병직 소장
현재의 연구단계에서 우리나라 근대 고미술품 수장가들의 취향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각 수장가들의 수장품의 전모는 물론 대략적인 내용도 충분히 조사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수장가들이 어떠한 분야에 얽매이기 보다는 좋은 물건을 보면 수장하려는 성향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우리나라 근대 수장가들의 윤곽이 형성되는 시기인 1920-30년대, 특히 1930년대야 말로 고미술품 거래가 활성화된 시기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일본인 수장가는 물론 우리나라 근대의 수장가 역시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오던 여러 종류의 고미술품의 품목을 가리지 않고 다량으로 수집하였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20-30년대 이후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근대의 주요 수장가들의 수집 성향 등을 분석하려면 주요 수장가 전반에 대한 연보적 생애는 물론 수장품에 대한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조사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장승업, <홍백매 십선(十扇) 병풍>, 『조선고적도보』 제14책, 도 6047, 이병직 소장
필자는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수장품의 처리 방식에 따라 ① 전형필과 같이 수장하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유형, ② 장택상⋅손재형과 같이 수장하였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조금씩 유출되다가 결국 모두 흩어진 유형, ③ 박창훈과 같이 다량 수집했다가 한꺼번에 모두 처분해 버리는 유형, ④ 함석태와 같이 소중히 수집한 고미술품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량 몰수 또는 강탈당한 경우로 구분한 바 있다. 이병직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의 네 가지 유형 가운데 세 번째인 박창훈과 비슷한 유형으로 여겨진다. 다만 박창훈의 경우가 경제적 이득의 극대화가 목적이었는데 비해, 이병직의 경우는 교육에의 투자라는 공익적 기여가 더욱 큰 의도였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삼국유사 최고(最古) 유일본을 들고 있는 소장자 이병직」, 『경향신문』, 1963년 7월 2일
일제강점기 당시 굴지의 수장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병직은 자신의 방대한 수장품을 1937년과 1941년 두 차례에 걸쳐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회에서 처분하였고, 1950년 6·25 두 주 전에 경성미술구락부의 후신 격인 한국고미술협회의 경매회에서 또 한 번의 경매회를 개최하여 중요한 전적류를 처분하였다. 근현대 국학(國學)의 산 증인이었던 통문관주인(通文館主人) 이겸로는 "우리 학계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하는 뜻에서 쾌척하였던 것"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연고가 있는 경기도 양주의 효촌초등학교와 양주중학교 등에 희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목적이 아닐까 싶다. 교육에의 투자와 함께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국보’ 『삼국유사』를 안전하게 잘 보존한 사실은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미담이다. 이병직은 고미술품의 수장과 보존,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모범적 수장가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