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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 이병직 : 1950년의 '수진재장서' 경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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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11일 서울 남산동 2가에 있던 한국고미술협회에서 이병직의 수진재장서(守眞齋藏書) 약 1500여 책, 종수(種數)로는 261종을 경매하였다. 한국고미술협회는 광복 후 서울 남산동 2가에 있던 경성미술구락부의 건물을 인수하여 출발한 것으로 전한다. '수진재(守眞齋)'는 이병직의 서재 명으로서 수진재 장서의 대부분이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이인영(李仁榮: 1911-?)의 장서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서점인 통문관(通文館) 주인(主人) 이겸로(李謙魯)는 이병직이 "[이인영에게서] 중가(重價)로 양수(讓受)하였다가 우리 학계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뜻에서 쾌척"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교육 사업에의 투자를 위한 자금마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양수(讓受)’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넘겨받음”이지만, 수장가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구입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924년에 개최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서부(書部)' 입선자 명단.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이한복(李漢福) 다음으로 이병직의 이름이 보인다.
『시대일보』, 1924년 5월 29일.

목재상과 포목상을 경영하던 평양 갑부의 아들인 이인영은 대학 졸업이후 고활자본과 고각본 수집에 열을 올려 많은 고서를 구입하였다. 이인영의 장서는 그의 서재 청분실(淸芬室)에 보관되었는데, 청분실은 평양 본가(本家)의 몇 동(棟)에 걸치는 넓은 서재 중에서 고서만 수집, 보관, 연구하던 존경각(尊經閣: 성균관 안에 건립된 도서관 건물) 같은 한적실(漢籍室)이었다고 전한다. 이인영은 그가 소장한 1-2만권의 책 가운데 귀중본 540종을 경 사 자 집(經史子集)으로 분류하여 1944년에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을 발간하였다. 이겸로에 의하면 이인영의 평양 자택에 적어도 1만권 이상의 전적을 소장되어 있었다고 했지만 역사학자 김성준은 이인영에게서 1942년 봄 서울 집에서 평양 본가에 책을 옮길 때 철도화물차 1량을 대절하여 운반하였는데 2만권이 넘는 방대한 양이었다는 말을 6·25 전에 직접 들었다고 하였다. 이인영은 월남할 때 『삼국유사』 등의 고서를 서울에 갖고 내려 왔으나 집을 마련하기 위해 처분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에 이병직이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직은 『삼국유사』를 전쟁과 이후의 혼란기에도 지켜냈고 지금은 그의 이성손자 곽영대가 수장하고 있으며, 1965년에 보물 제 419호에 지정되었다가 2003년에 국보 제 206호로 변경되었다.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하는 '역대명가유필진적전(歷代名家遺筆眞蹟展)'에 대한 '명사들의 찬사'
맨 아래에 '조선의 서도는 독특'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병직의 사진이 보인다.
제일 위 사진은 윤덕영이고 그 아래로 이윤용, 김용진의 사진이다. 『매일신보』 1938년 5월 28일.

이병직의 이름하에 개최된 세 차례의 경매회 가운데 1937년과 1941년의 경매회는 서화, 도자, 공예품이 모두 출품되었고 1950년의 경매회에는 서적류만이 출품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번의 경매회야 말로 이병직이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방대한 골동과 서화를 수장했던 주요 수장가 가운데 하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병직이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 수장가 가운데 하나였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지만 그의 수장경향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우리나라 근대의 대수장가로 꼽히는 장택상⋅이병직은 도자와 서화, 오봉빈⋅박창훈은 서화, 박병래는 도자 수집에 전념했다는 사실과 이들에 비하여 다소 연하인 전형필은 서화, 도자, 전적 등 고미술품 전반을 망라하는 수장경향을 보였음은 알려진 바이다.


 '양주중학교 설립기금 전재산 40만원을 혜척(惠擲)', 『동아일보』 1939년 9월 9일의 신문기사.
양주중학교는 의정부고등학교의 전신이다.


'40만원을 단번에 던져',  양주중학교 설립기금 40만원을 기부한 이병직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한민보』
1939년 10월 26일 신문기사.

그러나 이병직의 경우도 전적, 조각 및 목가구 등의 공예품도 다량 수집했음을 앞에서 언급한 세 차례의 경매회를 통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수집 취향을 단정 짓기는 어렵다. 수장가들의 수집경향을 파악하기 전에 그들의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개의 수장가들은 어떠한 분야에 치중하여 수장하고자 하더라도 다른 분야의 좋은 물건을 보면 수장욕이 발동함을 전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937년 6월 이병직의 기부로 설립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는 '이병직송덕비'.

1920-30년대, 특히 30년대는 고미술품의 유통이 활발했던 시기로서 고미술품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당시의 수장가들은 자연스럽게 여러 종류의 고미술품을 수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미술평론가이자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이토록 풍성하게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수집할 수 있었던 시기는 바로 1920-30년대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고미술품 애호가들은 종류를 막론하고 많은 고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었고 주요 수장가들의 윤곽도 드러나게 되었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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