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로서의 이병직은 구한말 내시들 가운데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유재현의 손자뻘로서 내시들의 세계에서는 중요한 계보를 이은 인물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유재현은 갑신정변시 김옥균을 꾸짖다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유재현에게 관판(棺板) 1부를 하사하고 매년 기일에 맞추어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시호를 주려 하는 등, 그에게 특별한 신임을 보였다.
정리하자면 이병직의 일생을 규정하고 제한한 중요한 요인은 그가 내시였다는 점이다. 이병직이 뛰어난 서화가이자 손꼽히는 수장가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 중심에서 활동하지 못하였던 것은 성격 등 여러 요인도 있겠지만 내시였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으리라 추정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불행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이병직은 그의 나이 19세 때인 1915년부터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에서 공부하여 1918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김규진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서화가로서 영친왕과 순종의 서화교사를 지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김규진은 18세 때에 청나라로 유학하여 연마한 대륙적 필력을 폭넓게 발휘하였고, 글씨에서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모든 서법에 능했으며,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김규진은 관직을 그만 둔 1907년에 서울 소공동 자신의 작업실에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을 개관하였고 1913년에는 천연당사진관 내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병설하여 서화를 제작 및 판매하였다. 김규진은 사진사적 입장에서 보면 영업사진관의 대중화를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 전경, 현 서울시 중구 소공동.
시대와 대중의 취향을 잘 파악하여 상업화할 줄 아는 선구적 감각의 소유자인 김규진은 특히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였다. 서화연구회는 수요일과 토요일 두 번 3-4시간 씩 난죽과 서예를 주로 가르치는 김규진의 개인 사립학원과 같은 성격이 강했다. 한편 풍류교양을 위해 배우러 온 기생들과 취미를 위해 수강한 일본인 총독부 고관과 실업가 및 그들의 부인을 가르치는 데 이병직이 부강사로 가르치기도 하였다는 사실은 김규진이 이병직에 대하여 서화실력에서는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도 신뢰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병직의 대나무 그림은 김규진의 『신편해강죽보(新編海岡竹譜)』를 반영한 그림이 많고 제화시 역시 김규진이 자주 사용하던 시를 쓰고 있으며, 대나무를 그릴 경우 절죽(竹折) 부분을 어긋나게 하고 죽간(竹竿)을 쌓아올리는 기법 및 댓잎이 부채꼴 모양으로 뭉쳐있고 죽간과 만나는 곳은 그물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 등에서 김규진의 세죽(細竹) 그리는 방식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김규진, <묵죽(墨竹)>. 紙本水墨, 39.8×131㎝. |
이병직, <총죽(叢竹)>, 조선미술전람회 4회 출품작, 1925. |
김규진은 영업사진관의 대중화에 기여함과 아울러 작품 가격을 적은 표인 ‘윤단(潤單)’을 만들어 그에 따라 작품을 주문 받고 제작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의 미술시장 및 서화유통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인물이다. 서화를 돈을 받고 판매한다는 것을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 여기던 당시에 서화를 하나의 상품이라는 인식하고 그림가격을 공개할 것을 김규진이 앞장서 주장한 것은 중국 유학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근대적 사회로의 변화를 일찍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병직이 굴지의 수장가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 그가 부유한데다 예술적 소양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의 스승이 당대의 인기 서화가로 이재(理財)에도 밝은 김규진이라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병직은 김규진에게서 서화는 물론 대중적 취향의 파악과 함께 미술품 매매 등 동시대 다른 서화가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선구적 감각까지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