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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 이병직: 출신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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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가 되기 이전의 이병직의 가계 및 내시가 된 직접적인 이유 등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병직의 이성손자[이성양자의 이성양자]인 곽영대(법명: 道慧)의 전언에 의하면 "1903년 그[이병직]의 나이 7살 때 사고로 '사내'를 잃은 뒤 강원도 홍천에서 7000석꾼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조선 왕조 내시부의 마지막 교관을 지낸 정완하 노인(1893 경-?)

이병직이 조선 말기 내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내시부의 마지막 교관을 지낸 정완하의 구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에 역사학자 이이화는 내시부의 마지막 교관을 지낸 정완하 노인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벌마을에서 만나 채록하였는데, 정완하 노인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내시는 관동파(館洞派)와 자하동파(紫霞洞派)로 나뉘었고, 구한말에 와서 관동파는 유재현(柳載賢)과 이병직이, 자하동파는 나세환(羅世紈)과 강석호(姜錫鎬)가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하였다. 관동파는 동대문 밖에 나와 살면서 그들의 묘를 창동과 월계동에 잡았고, 자하동파는 서대문 밖 양주군 삼상리 일대에 살면서 거기에 자기들의 묘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시들의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내시는 고려 말의 환관 윤득부의 장자 안경중(安仲敬)과 차자 김계경(金季敬)에 의해 크게 계동파(桂洞派)와 장동파(壯洞派)로 구분되며 계동파는 판곡파와 과천파, 장동파는 강동파와 서산파로 구분되었다. 정완하 노인의 구전과 『양세계보』의 내용이 다른 것을 보면 내시 가문도 다양한 구성과 계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 직후의 고종(오른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 옆에 내시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인다.

왕이 먹는 음식의 품질을 검사하고 감독[監膳]하며, 왕명을 출납[傳命]하고, 대전(大殿)의 문을 지키며 들고나는 사람들을 안내[守門]하며, 대전 일대를 청결하게 유지[掃除]하는 임무를 맡은 내시는 내시(內官) 또는 환관(宦官)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 왕실의 내시는 대부분 1908년을 전후하여 출궁되었고, 내시부(內侍府) 역시 1908년을 전후하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황철(黃鐵: 1864-1930), <경복궁 집옥재>, 1880년대 경.

그러나 내시제는 조선의 멸망과 함께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극히 일부의 내시가 궁녀들과 함께 궁중 내에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2월 1일부터 동년 3월 31일까지 궁궐 내에서 생활하던 순종의 일상을 기록한 『내전일기(內殿日記)』에 숙직 나인과 협시(挾侍)라는 명칭으로 보아 극히 일부의 내시들이 궁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병직이 내시로서 활동한 기간은 아마도 이병직이 7세의 나이로 내시집안에 입양된 1903년 이후에서 12세가 되던 1908년까지의 짧은 기간이었거나 1908년 내시제 폐지 이후 비공식적으로 내시제가 유지될 때 또는 이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내시들이 처음 벼슬하는 시기는 17-21세 전후가 가장 많으나 12-16세 사이도 상당한 숫자이며 8세인 경우도 있다. 이병직이 내시의 집안에 입양된 해는 1903년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내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 조선왕실의 법도는 많이 무너졌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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