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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 이병직: 이용우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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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로(墨鷺: 이용우)의 장난은 유명해 신문사 망년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1930년대: 편집자) 신문사에서는 신년호에 화가와 서예가들의 서화를 받아 지면을 장식하기 위하여 망년회로 한 턱 내는 일이 있었다. 초청받은 서화가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을 비롯한 일류들이었는데 어느 해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도 참석하였다. 이병직은 사군자의 대가였는데, 내시(內侍)였다.

  그러나 학식이 많고 사람도 소탈해 자신이 내시임을 공언할 정도로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이병직이 난초와 매화를 화선지에 얌전하게 그리고 나자 묵로가 대뜸 뒤를 이어 괴상한 춘화를 한 장 그렸다. 그리고 나서 이병직을 향해 "송은, 이거 무언지 알아?"하고 껄껄거렸다. 그것을 본 이병직이 얼굴빛이 변해 어쩔 줄 모르는데 좌중은 웃지도 못하고 이병직이 어떻게 나오나 하고 어안이 벙벙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병직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두루마기를 떼서 입고 모자를 들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묵로와 제일 친한 최우석(崔禹錫)이 일어서서 "이 미친놈아, 내시한테 춘화도를 그려 보이면 어쩌란 말야!"하고 소리를 높였고, 좌중에서 제일 연장인 춘곡이 "묵로, 그 주착 좀 작작 부려!"하고 점잖게 꾸짖었다. 좌중이 모두 불쾌해 하는 것을 알자 묵로는 "내가 실수했군! 여러분, 미안하게 되었읍니다"하고 사과하였다. 그리고는 제 손으로 큰 컵에다 술을 철철 넘게 따라 쭉쭉 들이켰다.


송은 이병직(1896-1973)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조용만(趙容萬: 1909-1995) 선생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30년대 문화계 산책: 울밑에 선 봉선화야』(범양사출판부, 1985)에 수록된 「동양화가 이용우의 기행괴행(奇行怪行)」 가운데 일부이다.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2회나 입상한 유명 서화가이자 근대의 주요 수장가, 미술품 감식안(鑑識眼), 당대를 대표하는 부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였고 그의 수장품을 경매한 세 차례의 경매회는 그 규모와 유물의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부를 사회로 환원하여 교육 사업으로 승화시키는 등 민족사회에 귀감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의 주요 수장가들의 행태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1937년 6월 이병직의 기부로 설립된 효촌초등학교(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이병직은 1939년에는 양주중학교(현 의정부고등학교) 설립에 40만원을 쾌척하는 등 교육 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이병직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규정하고 운신의 폭을 제약한 것은 그가 대한제국기의 내시였다는 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조용만은 이병직이 “학식이 많고 사람도 소탈해 자신이 내시임을 공언할 정도로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 회고하였지만 '내시'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그의 활동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병직이 뛰어난 예술가이자 자선가로 활동을 하더라도 내시 출신에 대한 주변의 눈총은 그의 활동을 위축시켰고 화단에서도 중심이 되어 활동하기 보다는 비주류로 일관할 수밖에 없게 한 주요 원인으로 생각한다. 이병직이 수기자오적(修己自娛的) 성격이 강한 사군자에 매진했고 작품세계 역시 활달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요인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김정희,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각  31.9×129.5㎝.
1937년 3. 26일에 개최된 '이병직서화골동경매회'에 출품. 현 간송미술관 소장.

  이번 연재부터 일제시기의 손꼽히는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송은 이병직의 생애와 예술 및 수장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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