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 1916. 12. 15
고서화의 삼일 (5) 만해
한용운, 「고서화의 삼일(三日)」 5, 『매일신보』, 1916. 12. 15
익일(翌日)에 동행(同行)을 약(約)했던 남천(南泉) 도봉(道峯) 양사(兩師)는 사고(事故)를 인(因)하여 동행(同行)치 못하겠다는 통지(通知)가 래(來)하고 김노석장(金老石丈)도 하오(下午) 일시(一時)가 과(過)하도록 불래(不來)하는 고(故)로 독행(獨行)하여 돈의동(敦義洞)을 향(向)할 때 중로(中路)에서 노석장(老石丈)을 봉간(逢看)하니 차(此)는 그가 타인(他人)과 동행(同行)하여 바로 위창댁(葦滄宅)에 왕(往)하였다가 다시 여(余)에게 래(來)하는 길이니 기충신(其忠信)함을 경복(敬服)하겠더라 기노고(其勞苦)를 사(謝)하고 같이 왕(往)하니 조선제일류(朝鮮第一流)의 호고가(好古家)인 최남선씨(崔南善氏)와 최성우씨(崔誠愚氏)가 좌(坐)에 재(在)하니 차(此)는 곧 노석장(老石丈)과 동행(同行)한 양씨(兩氏)와 양씨(兩氏)에 대(對)하여 구활(久濶)을 서(敍)하고 바로 '근역서휘속(槿域書彙續)'을 보다.
오세창, <근묵(槿墨)> 제자(題字), 종이에 먹, 1943년
오세창 편, 『근묵』 전34첩,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제일축(第一軸)은 이십팔인(二十八人)의 서(書)인데 이인복(李仁復)의 금자(金字)와 고려(高麗) 공민왕시(恭愍王時)에 사명(使命)으로 지나(支那)에 왕(往)하였다가 본조혁명(本朝革命)의 보(報)를 문(聞)하고 형초(荊楚)의 간(間)에 유(遊)하여 고절(苦節)을 보(保)하다가 영(永)히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김주(金澍, 號 聾岩)의 서(書)를 견(見)하겠고 이십팔인(二十八人)의 서(書)의 제사축(第四軸)에는 임경업(林慶業)의 서(書)에 일탄(一歎)을 발(發)하고 이십팔인서(二十八人書)의 제오축(第五軸)을 종(終)하니 재속(再續)에 당(當)한지라 전축(前軸)은 이토정(李土亭) 석희안(釋希安) 병(並) 사십사인(四十四人)의 서(書)가 유(有)하고 후축(後軸)은 신광수(申光洙) 병(並) 삼십이인(三十二人)의 서(書)로 성(成)하고 삼속(三續)의 제일축(第一軸)은 삼십팔인(三十八人)의 서(書)오. 제이축(第二軸)은 석풍열(釋豊悅) 병(並) 삼십사인(三十四人)의 서(書)오 제삼축(第三軸)은 이십구인(二十九人)의 서(書)오 사속(四續)의 제일축(第一軸)은 사십팔인(四十八人)의 서(書)라. 그 중(中)에 임란(壬亂)에 진주(晋州)에서 순절(殉節)한 최경회(崔慶會)의 서(書)를 견(見)할지라. 촉석루(矗石樓)는 의구(依舊)하니라 남강(南江)은 부진(不盡)이니라 혼(魂)이여 백(魄)이여 장사(壯士)의 영(靈)이여 남국풍우(南國風雨)에 장사(壯士)는 무양(無恙)하오 사십삼인서(四十三人書)의 제이축(第二軸)은 이삼만(李三晩)의 서(書)가 유(有)하고 서홍순(徐弘淳)의 태서(苔書)는 섬교(纖巧)를 극(極)하여 기정세(其精細)함을 탄미(歎美)치 아니할 수 없고 최말(最末)에는 민영익(閔泳翊)의 서(書)에 지(止)하니 근역서휘속(槿域書彙續)도 차(此)에 지(止)하여 종(終)하였도다 시(時)는 하(何)오 사시반(四時半)이러라.
민영익, <글씨(秋)>, 종이에 먹, 35.8×51.8㎝(『근역서휘』 四續後-43)
차속첩(此續帖)은 십이축사백팔인(十二軸四百八人)의 서(書)로 성(成)하니 본첩(本帖) 이십삼축(二十三軸) 육백구십이인(六百九十二人)에 가(加)하면 범삼십오축(凡三十五軸) 일천일백인(一千一百人)의 서(書)오 또 화첩(畵帖) 칠축(七軸) 일백구십일인(一百九十一人)의 이백오십화(二百五十畵)를 가(加)하면 합(合) 일천이백구십일인(一千二百九十一人)의 수적(手跡)이며 신라(新羅) 김생(金生)의 시대(時代)로부터 지금(至今)까지 일천이백년간(一千二百年間)이라. 연(然)하면 여(余)는 일(日)로는 삼일(三日)이나 시(時)로는 불과(不過) 팔시간(八時間)의 단촉(短促)한 광음(光陰)을 가(暇)하여 별(別)로 노고(勞苦)도 없이 장애(障碍)도 없이 상하(上下) 일천이백년간(一千二百年間) 전후(前後) 일천이백구십일(一千二百九十一) 아고인(我古人)의 진묵(眞墨)을 견(見)함은 하등(何等)의 기연(奇緣)이며 하등(何等)의 행복(幸福)이냐 조선고서화(朝鮮古書畵)에 대(對)하여는 여(余)만큼 인연(因緣)이 심후(深厚)한 인(人)도 좀처럼 쉽지 못하리로다.
오세창 편, 『근역서화사』 상중하 3책․별책, 24×16.2㎝
(1928년 계면구락부에서 간행될 때에는 『槿域書畵徵』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時)의 전후(前後)와 지(地)의 원근(遠近)과 기회(機會)의 참차(參差)를 인(因)하여 견(見)치 못하는 자(者)는 물론(勿論) 동시동지동기회(同時同地同機會)에 재(在)한 삼일간(三日間)에 여(余)와 동관(同觀)한 제인(諸人)으로 언(言)하여도 수(誰)가 시종(始終)을 일관(一貫)코저 하지 아니하였으리오마는 일인(一人)도 여(余)와 여(如)히 선종(善終)할리는 무(無)하도다. 변천(變遷)의 속(速)이 화륜(火輪)과 여(如)하고 모순(矛盾)의 사(事)가 십지(十指)를 초(超)하는 인세(人世)에서 삼일(三日)의 연(緣)을 차(借)하여 이미 수집편성(蒐集編成)한 서화(書畵)를 열람(閱覽)하기도 오히려 여의(如意)치 못하거늘 하물며 다년(多年)의 심력(心力)을 비(費)하여 효천(曉天)의 잔성(殘星)과 여(如)히 궁산(窮山)의 낙화(落花)와 여(如)히 섞이고 거두기 어려운 잔편단간(殘編短簡)의 고서화(古書畵)를 채집(採集)하여 성공(成功)한 위창선생(葦滄先生)에게 대(對)하여는 기노고(其勞苦)를 위(爲)하나니 보다 영(寧)히 기행복(其幸福)을 하(賀)하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