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 1916. 12. 13
고서화의 삼일 (3) 만해
계속(繼續)하여 이십구인(二十九人)의 삼십이화(三十二畵)로 성(成)한 제오축(第五軸)을 열(閱)하니 기중(其中)에는 아순조시(我純祖時)의 기(妓) 소미(小眉)의 난(蘭)과 박창규(朴昌珪)의 낙화(烙畵)를 특색(特色)이라고 할 밖에는 없고 이십사인(二十四人)의 필(筆)로 성(成)한 제육축(第六軸)의 삼십사화(三十四畵)와 제칠축(第七軸) 이십육인(二十六人)의 삼십삼화(三十三畵)를 간진(看盡)하고 최후(最後)의 공폭(空幅)을 번(飜)하니 동관(同觀)하던 박한영사(朴漢永師)는 공폭(空幅)을 지(指)하면서 언(言)하되 최선(最善)의 진화(眞畵)는 차(此)에 재(在)하도다.
정종여, <위창선생옥조(葦滄先生玉照)>, 종이에 수묵담채, 선면, 23×52.5㎝, 1941년
인우쌍망(人牛雙忘)의 경(境)이 차(此)아니냐 하니 이상(以上)에 간화(看畵)한 칠축(七軸) 일백구십일인(一百九十一人)의 이백오십화(二百五十畵)가 거연(居然)히 일구(一句)의 선화(禪話)로 화(化)하였더라 여(余)는 이에 화축(畵軸)을 간(看)코자 하나 시간(時間)이 아로 여(與)치 아니함에 나하(奈何)오 영예(榮譽)있던 서화(書畵)의 주인(主人)들은 이금(而今)에 안재(安在)오. 기수택(其手澤)만 존재(存在)할 뿐이니 소회이인(所懷伊人)은 상상(想像)키도 난(難)하도다. 이같이 고인(古人)들을 보내기에 너무 무정(無情)하던 광음(光陰), 얼마나한 아(我)라고 아(我)를 위(爲)하여 잠깐인들 머무랴 시침(時針)은 오시반(五時半)을 지(指)하니 주인선생(主人先生)에게 대(對)하여 종종후의(種種厚誼)를 사(謝)하고 서첩(書帖) 배람(拜覽)의 후기(後期)를 문(問)하니 하일(何日)이라도 오후(午後)이면 가극(暇隙)이 유(有)하니 수의(隨意) 래관(來觀)하라는 분외(分外)의 후애(厚愛)를 몽(蒙)한지라 동행(同行)하였던 양씨(兩氏)에게 계속(繼續) 동관(同觀)을 요구(要求)하였으나 차양씨(此兩氏)는 시(時)에 경제(經濟)의 책무(責務)가 유(有)한 고(故)로 산만(散漫)하여 시국(時局)의 구속(拘束)을 초탈(超脫)한 여(余)와는 형이(逈異)한지라. 명일(明日)의 취산(聚散)은 자연(自然)에 임(任)하고 삼인(三人)이 악수귀래(握手歸來)하니 만가홍등(滿街紅燈)에 일천(一天)이 도한(都寒)인데 하처(何處)의 종성(鐘聲)은 인생(人生)의 흑암(黑暗)을 파(破)하더라.
오세창 편, 『근역서휘』 전37첩, 서울대학교박물관
익일(翌日)에는 숙약(宿約)이 유(有)하던 김남천(金南泉) 강도봉(康道峯) 양사(兩師)를 청래(請來)하여 동행(同行)을 의(擬)할새 마침 광문회(光文會)에 유(留)하는 김노석장(金老石丈)이 왕방(枉訪)한지라 사유(事由)를 고(告)하고 동행여부(同行與否)를 문(問)하니 노석장(老石丈)은 아도 일차왕관(一次往觀)코자 하였으나 상당(相當)한 기회(機會)가 무(無)하였다하고 흔연(欣然)히 사양(辭讓) 영락(領諾)하는 지라 사인(四人)이 동행(同行)하여 서첩배관(書帖拜觀)을 시(始)하니 하오(下午) 일시반(一時半)이라. 서첩(書帖)의 제조(製造)도 미려정교(美麗精巧)함이 화첩(畵帖)과 일양(一樣)이라 표제(表題)는 '근역서휘(槿域書彙)'니 전부(全部) 이십삼축(二十三軸)으로 성(成)한 대서첩(大書帖)이러라.
김응원, 「근역서휘서」, 1911년, 종이에 묵서, 28.6×44.3㎝
제일축(第一軸)의 제일폭(第一幅)은 조선(朝鮮) 최고(最古)의 명필(名筆) 김구(金玖(金生))의 흑지(黑紙)에 금서(金書)한 금강경(金剛經) '淨心行'善分'의 초두기행(初頭幾行)이오 제이폭(第二幅)은 최치원(崔致遠(孤雲))의 서(書)니 즉(卽) 은서(銀書)한 비니장(毘尼藏)의 일편(一片)이라 차이폭(此二幅)에 대하여는 기진적(其眞跡)인지 부(否)인지 기분(幾分)의 의(疑) 용(容)할 여지(餘地)가 유(有)한듯하나, 연(然)하나 일특색(一特色)이 아니랄수는 없고 불경(佛經)을 금은(金銀)으로 서(書)하였음은 신라(新羅)의 불교(佛敎)를 숭봉(崇奉)한 사실(事實)을 증(證)하기 족(足)하도다 성(盛)하지 아니하랴.
오경석, 『삼한금석록』 1책, 24.3×15.8㎝, 1858년
우리의 선인(先人)들의 수(手)에서 장엄(莊嚴)된 신라(新羅)의 시(時)에는 모든 일이 다 금은(金銀)의 서(書)와 같이 찬란(燦爛)한 광명(光明)을 방(放)하였나니라. 여(余)의 안(眼)에 자연적(自然的)으로 영사(映射)되는 것은 정몽주(鄭夢周)의 서(書)라. 이재(異哉)라. 작일(昨日)에 공민왕(恭愍王)의 화양(畵羊)을 견(見)할 시(時)에 기(起)하였던 망상(妄想)이 영단(永斷)치 못하였는데 금(今)에 정몽주(鄭夢周)의 서(書)을 대(對)하였도다. 조선인(朝鮮人)이야 수(誰)가 부지(不知)하랴마는 말하자면 국가(國家)의 운명(運命)과 같이 정사(情死)한 고려(高麗) 최후(最後)의 남아(男兒)니라. 선죽교변(善竹橋邊)에서 빨래하는 표아(漂娥)들이야 무심(無心)하기 백구(白鷗)와 다르랴. 부지중(不知中)에 사십일인(四十一人)의 제일축(第一軸)을 간과(看過)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