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1916년 11월 26, 27일, 28일의 삼일 간 박한영(朴漢永), 김기우(金杞宇) 등과 함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서울 종로구 돈의동 집을 방문하였다. 한용운은 이때에 오세창이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 등을 배관한 후, 그 감회를 『매일신보(每日申報)』에 「고서화(古書畵)의 삼일(三日)」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1916. 12월 7일, 8일, 13일, 14일, 15일) 연재하였다. 고려(高麗) 말(末)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 말(末)까지 선인들의 필적(筆跡)을 모아 엮은 서첩인 ≪근역서휘≫ 37책과 조선의 역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 67점을 모은 화첩인 ≪근역화휘≫ 3책은 서화사에서는 물론 역사, 생활사, 민속 등의 측면에서도 풍부한 자료를 전해주고 있다.
이 연재에서 만해는 자신을 '서화배척당(書畵排斥黨)'이라 낮추고 위창을 '조선고서화의 주인(主人)'이라 하며 위창의 업적을 높이 기렸다. 만해가 극찬했던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는 친일군인이자 관료․거부인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수장하였다가 그의 사후 1940년에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되었다. 만해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글은 당시의 시대상과 미술관(美術觀)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록으로서 이번 호 이후 전재하고자 한다.
(※ 한글병기를 하였고 일부 현대문법에 맞게 한 부분도 있으며 중복된 한자는 생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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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每日申報)』, 1916. 12. 7
고서화(古書畵)의 삼일(三日) (1) 만해(萬海)
조래(朝來)의 한우(寒雨)가 초제(初霽)한 11월 26일 하오 3시 반에 박한영(朴漢永) 김기우(金杞宇) 양씨(兩氏)와 동행하여 조선고서화(朝鮮古書畵)의 주인(主人)되는 위창(葦滄) 오선생(世昌)을 돈의동(敦義洞)에 방(訪)하다. 여(余)는 그의 조선고서화를 수집(蒐集)한다는 사(事)를 문(聞)한지 이구(已久)한지라 일찍 첨앙(瞻仰)의 회(懷)를 경(傾)하였으나 세(世)에는 기로(岐路)가 다(多)하여 인생의중(人生意中)의 사(事)를 재(載)한 □은 매양 탈선(脫線)되기 이(易)한 고(故)로 지금까지 □□의 기회를 미득(未得)하였더니 행(幸)으로 기우장(杞宇丈)의 주도(周到)한 소개를 뢰(賴)하여 적체(積滯)를 하였던 숙지(宿志)를 수(遂)하게 되니 여차(如此)한 소경영(小經營)도 다소의 파란(波瀾)을 경(經)치 아니하면 피안(彼岸)에 도달(到達)치 못함을 각(覺)하리로다. 근일(近日)에 훈작(勳爵)을 운동(運動)하나니 광업(鑛業)을 소개(紹介)하나니 일지문제(日支問題)의 현상(懸想)이니 구서전쟁(歐西戰爭)의 예언(預言)이니 득의(得意)니 낙망(落望)이니 장쾌(壯快)니 비참(悲慘)이니 불(佛)의 신통(神通)으로도 신(神)의 만능(萬能)으로도 어느 순간(瞬間)까지는 정돈(整頓)하기 어려운 심리(心理)로나 세계적 불사의(不思議)라고 할 만한 흑풍만장(黑風萬丈)의 경성(京城), 그 중에서 추풍황원(秋風荒原)의 백골(白骨)된 아고인(我古人)의 잔영(殘影) 즉 조선고서화를 방문(訪問)함은 낙막(落寞)이냐 □한(□閑)이냐 감상(感想)이냐 우연(偶然)이냐 여(余는) 일세(一世)의 기연(奇緣)을 차(此)에서도 득(得)하기 족(足)하다 하노라.
오세창 편, ≪근역서휘≫ 37책(부분). 서울대학교 박물관
오세창 편, ≪근역화휘≫ 3책, 서울대학교 박물관
여(余)는 서화를 부지(不知)한다고 하나니보다 □ 서화배척당(書畵排斥黨)이라함이 득당(得當)하리로다. 유시(幼時)로부터 서화를 학습하는 사(事)는 절무(絶無)하고 타인에게도 권장(勸獎)치 안할 뿐아니라 서화를 학습하는 인을 대(對)함에 왕왕비난(往往非難)한 사(事)도 유(有)하며 서화의 미악(美惡)을 물문(勿問)하고 일폭(一幅)도 장치(藏置)한 사(事)가 무(無)하도다. 여(余)가 서화배척당된 소이(所以)는 천품(天稟)의 우의(迂意)에서 출(出)함이니 즉 인생(人生)의 백년(百年)은 결(決)코 지묵간(紙墨間)에서 왕비(枉費)할바 아니라는 판단(判斷)이 일정(一定)하였고 근래(近來)에는 소위(所謂) 미술(美術)이라는 의미(意味)에 대하여 기분(幾分)의 사색을 가(加)하였으나 타산(他山)의 석(石)에 탁마(琢磨)되지 못한 여(余)의 미(美)에 대한 사고(思考)의 완옥(頑玉)은 미처 미의 광휘(光輝)를 발휘(發揮)치 못함인지는 부지(不知)하겠으나 하물(何物)보다도 진(眞)인 우주(宇宙)의 미는 과연 인위적(人爲的) 지묵간(紙墨間)에 재(在)하랴 하는 부정(否定)의 □에 온장(蘊藏)되었으므로 서화에 대한 감념(感念)이 일직냉담(一直冷淡)하여 '미(美)'라는 만세성(萬歲聲)의 리(裏)에서 열렬(熱熱)한 환영(歡迎)을 받는 서화의 □도 냉락(冷落)한 여(余)의 진(唇)에는 접근(接近)되지 못하였더라. 그러면 서화배척당인 여(余)의 정회(情懷)는 하고(何故)로 고서화의 성(聲)에 감발(感發)되어 방□(訪□)함에 지(至)하였는가. 사상(思想)의 변천(變遷)으로 초지(初志)를 이(移)함인가. 부(否)라. 여(余)는 서화기물(書畵其物)만을 완상(玩賞)코저 함이 아니라 후생(後生) 즉(卽) 금(今)의 아등(我等)을 위하여 미술의 황야(荒野)를 개척하기에 다소의 희생을 불석(不惜)하던 고인(古人)의 수택(手澤)을 접촉하여 감사(感謝)한 의(意)를 표하고자 함이니 환언(換言)하면 서화만을 애(愛)함이 아니라 고(古)를 호(好)한다고 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