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이 『동아일보』 1936년 4월 14일-16일 3번에 걸쳐 연재한 골동수집과 도굴에 관한 글 가운데 세 번째인 4월 16일자의 뒷부분이다.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기만과 횡재의 골동세계 (3), 『동아일보』 1936. 4. 16
개성박물관 계단 앞에 서 있는 우현 고유섭
그것을 그대로 믿고 속아 사는 자가 가엾은 우자(愚者)가 아니고 무엇이랴. 물건을 기매(欺賣)하는 자는 오죽한 자이랴만 그것을 속아 대접하는 것은 요컨대 제 욕심에 제가 빠져 들어간 자작(自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수원수구(誰怨誰咎)이지 - 오히려 속았거든 속히 단념체념(斷念諦念)하는 것이 □자경역(□者境域)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는 애당초에 물건의 유래를 따지지 않고 신고(新古)를 가리지 않고 물건 그 자체의 호불호를 순전히 미적 판단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오히려 현명한 편이다. 애오라지 유래를 찾고 신고를 가리고 하는 데서 파가 생기는 모양이다. 물건의 유래를 찾고 신고를 차리자면 자기 자신이 그만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 물건도 비로소 품격이 높아지는 것이요 골동의 의의도 이곳에 비로소 살게 되는 것이다.
개성박물관 전경. 고유섭은 1933년 3월부터 1944년 6월 돌아갈 때까지 관장으로 재직하였다.
남의 판단과 남의 품평은 오히려 법정에 선 변호사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항상 주석판사(主席判事)가 될 만한 식견이 없다면 골동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다. 골동이라하면 단지 서양(西洋)□의 ‘큐리로’라든지 ‘쎈텐하이트’라든지 ‘뿌리 카 투락’과 글자도 다를뿐더러 발음도 닮고 내용까지도 닮은 것이다. 골동은 ‘비빔밥’이 아니요 ‘雅樂多’뿐이 아니다. 그러한 반면의 성질도 있기는 하나 동양에서의 골동정의(骨董定義)를 정당(正當)하게 내리자면 “역사와 식견과 인격을 요하는 취미판단의 완상(玩賞)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역사 즉 전통을 요하는 것으로 소위 ‘상서(箱書: 由緖)’라는 것이 중요시되는 것이며 식견을 요하는 것이므로 고귀난득(高貴難得)의 귀족적 긍지를 발휘케 되는 것이며 인격을 요하는 것이므로 개인주의적 윤리성을 띠우고 있는 것이다.
천리구(千里駒)도 백락(伯樂)을 기다려 비로소 준특(駿特)하여지고 용문(龍門)의 오금(梧琴)도 백아(伯牙)를 기다려 비로소 소리나듯이 골동도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가치와 의의가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다.
경주 석굴암에서(왼쪽 첫 번째가 고유섭, 오른쪽 첫 번째가 최남주, 두 번째가 황수영, 네 번째가 전재규)
인천시립박물관 뜰에 있는 고유섭 선생 기념비 앞에서
(왼쪽 두번째부터 진홍섭, 고유섭 선생 부인 이점옥 여사, 이경성, 최순우)
반면에 골동의 폐해는 또한 이러한 특성에 동존하여 있다. 전통을 중요시함으로 완고에 흐르기 쉽고 식견을 중요시함으로 여인동락(與人同樂)의 아량(雅量)이 없고 인격을 중요시함으로 명분에 너무 얽매이게 된다. 고만(高慢)하고 편(便)□되고 곤집(困執)된 것이 골동이다.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닌 곳에 물건이 있는 것을 보면 조만간 누가 찾아갈 입매(入賣)물건, 또는 찾지 못하고 유매물건(流賣物件)으로 밖에 아니 보인다. 따라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전당포 수전노의 물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요사이 이러한 전당포주가 경향에 매일같이 늘어간다. 이곳에도 통제의 필요가 없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