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이 『동아일보』 1936년 4월 14일-16일 3번에 걸쳐 연재한 골동수집과 도굴에 관한 글 가운데 세 번째인 4월 16일자 글이다. '황금광시대'라 불리는 1930년대 골동계의 기만과 사기로 점철된 추악한 면모를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기만과 횡재의 골동세계 (3), 『동아일보』 1936. 4. 16
고유섭 선생 스케치
어스름한 저녁 때, 농군같이 생긴 자가 망태에 무엇을 지고 누구에게 쫓겨드는 듯이 들어와 주인을 찾으면 누구나 듣지 않아도 고기(古器)를 도굴하여 팔러 온 자로 직각(直覺)케 된다. 궐자(厥者: 그 사람의 낮은 말)가 주인을 찾아서 가장 은근한 태도로 신문지에 아무렇게나 꾸린 물건을 꺼내어 보이니 갈데없이 고총(古塚)에서 가지고 나온 듯이 진흙이 섞인 청자(靑瓷)□□의 향로! 일견 시가 수천원은 될 것인데 호가(呼價)를 물어보니 불과 사오백원! 이미 욕심에 눈이 어두운지라 관상(觀相)을 하니까 궐자가 꽤 어리석게 보이므로 절가(折價)하기를 오할(五割), 궐자도 그럴듯하게 승강이를 하다가 못이기는 체하고 이, 삼백원에 팔고 달아나니 근자에 드문 횡재라고 혀를 차고 기뻐하던 것도 불과 하룻 밤사이! 밝은 날에 다시 닦고 보니 진남포(鎭南浦) 부전공장(富田工場)의 산물(産物)과 유사품(類似品)! 가슴은 쓰리고 아프나 세상에서는 이미 골동감정대가(骨董鑑定大家)로 자타가 공인케 된지 이구(已久)에 면목이 창피스러워 감히 발설도 못하나 막(莫)□어(於)□격(格)으로 이런 일은 불과 수일에 세상에 짝자그르하니 호소무우(呼訴無虞) 고물(古物)이라면 진짜(眞者)라도 이제는 손을 못대겠다는 무의식 중에 자백이 나오는 예 이러한 것이 비일비재하게 소식선(消息線)을 통하여 들어오는 한편 호의로 위조니 사지 말라 지시하여도 부득이 사서 좋아하는 사람, 이러한 예는 한이 없다.
경성제국대학 재학시 조선인 명부 학생들과 함께한 고유섭(제일 오른쪽 아래)
고유섭,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기만과 횡재의 골동세계」, 『동아일보』 1936. 4. 16.
심한 자는 ‘우동집’의 간장 독꾸리, 이쑤시개집 같은 것을 가져와서 진위를 묻는다. 원래가 진위는 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요 물건 자체에는 신고(新古)가 있을 뿐이다. 신고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도 있으나 진위를 묻게 되면 문의(問意)를 제일 몰라 대답할 수 없다. 진위의 문제와 신고의 구별을 세워 물을 만하면 그러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도 아니할 것이니까 문제(問題)하는 편이 이것도 무리일는지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물건은 꺼내보지도 않고 위선 물건의 설명을 가장 아는 듯이 하고 나서 결국 꺼내어 보는 것이 신(新)□작(作) 그러던 사람도 □력(歷)이 나기 시작하면 불과 사오 개월에 근 만원을 버렸다는 소식이 도니 알 수 없는 것은 이 골동세계의 변화이다. 이러한 소식이 한 번 돌고 보면 너도나도 허욕에 떠도는 무리가 우후(雨後)의 죽순처럼 고물고물(古物古物)하고 충혈이 되어 돌아다니니 실패와 성공, 기만과 획리(獲利)는 양극삼파(兩極三巴)의 현황(眩煌)한 파문(波紋)을 그리게 된다.
개성 현화사비 조사(좌로부터 고유섭, 김경배, 황수영 외 1인)
예술품에 정가가 없다하지만 골동쳐놓고 가격을 묻는 것은 우극(愚極)한 일이다. 일전(一錢)이고 천원이고 흥정되는 것이 값이고 보니 취리(取利)의 묘(妙)는 오직 방매기술(放賣技術)에 달렸지만 적어도 골동을 사려는 자가 평가를 묻는다는 것은 격에 차지 않는 일이다.
요사이 신문에도 보였지만 박물관에서 감정한 것이라 하여 석연(石硯) 하나에 기만원이라는 데 속아서 수백 원을 견탈(見奪)한 자가 식자계급(識者階級)에 있다하니 그 역(亦) 제 욕심에 어두워 빼앗긴 것으로 속인 자를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박물관에서는 결코 장사치의 물건을 감정도 해주지 않지만은 감정을 해준다손 치더라도 수 천 만원짜리를 그렇게 명문(明文) 한 쪽 없이 구설(口說)로만 설명하여 줄 리가 없다. 물건 가진 자가 제 물건 팔기 위하여 무슨 조언작설(造言作說)을 못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