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호에 게재한 고유섭의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빈번한 부장품의 도굴」, 『동아일보』 1936. 4. 14의 나머지 부분이다.
고유섭 선생. 개성박물관 사택 뜰에서(1943년 경)
조선에 있어서의 고분도굴은 이미 삼국말기에 있었으니 오늘날에도 고구려 백제대 고분이 하나도 성치 못한 것은 나당연합군의 유린의 결과로 추측되고 고분의 도굴이라는 것은 지나(支那)민족의 전위(專爲)특색같이 말하나 고려사를 보면 익산 무(武)□왕릉의 도굴이라든지 무릉(武陵) 영릉(迎陵) 후릉(厚陵) 경릉(慶陵) 고릉(高陵) 등 기타 제 릉의 피해가 려인(麗人)의 손으로 또는 몽고 왜구 등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게 도굴되었다. 근자에는 개성, 해주, 강화 등지의 고려 고분이 여지없이 파멸되었으니 옛적에는 오직 금은만 훔치려는 도굴이었으나 일청(日淸)전쟁 이후로부터는 도자기의 골동열이 눈뜨기 시작하여 작금 오륙년 동안은 전산이 벌집같이 파헤쳐졌다.
평양 부근 도굴 보도 기사, 『동아일보』 1931. 11. 18 |
개성 부근 전문 도굴 일당 검거 기사, 『조선중앙일보』 1936. 4. 25 |
봉분의 형태가 조금이라도 □□은 것은 벌써 초기에 다 파먹은 것이오. 지금은 평토가 되어 보통사람은 그것이 분묘인지 무엇인지 분간치 못할 만한 것까지 사도(斯道)의 전문가(?)는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한다. 그들에게 무슨 □자(字)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오 철장(鐵杖)하나 부삽하나면 편답천하(遍踏天下)가 아니라 편답분□(遍踏墳□)케 되는데, 철장은 의사의 청진기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오, 부삽은 수술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인데 철장으로 평지라도 찔러보면 장중(掌中)에 향응(響應)되는 촉감만으로도 그 속의 광실(壙室)의 유무는 물론이어니와 기명(器皿)의 유무, 종류, 기타내용을 역력세세(歷歷細細)히 알 수 있다하며 심한 자는 남총(男塚)인지 여총(女塚)인지 노년총(老年塚)인지 장년총(壯年塚)인지 소년총(少年塚)인지까지 알게 된다하니 듣기에는 입신의 묘기 같기도 하나 예까지는 눈썹을 뽑아가며 들어야할 것이다. 하여튼 청진의 결과 할개(割開)의 요(要)가 있다고 인정되는 때는 부삽으로 흙만 긁어내면 보물은 벌써 장중(掌中)에서 놀게 되고 요행히 몇 낱 좋은 물건이 나면 최저 기십원으로부터 기백원 기천원까지는 자본 안 들이고 □□케 되니 이렇게 수월한 장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엾게도 조선의 ‘술리-만[트로이와 미케네 문명을 발견한 독일의 고고학자 Schliemann, Heinrich, 1822.1.6~1890.12.26]’들은 발굴에 계획이 없을뿐더러 발굴품의 처분에도 난잡한 흠이 적지 않다.
고유섭 선생 유필(遺筆).
위선 그것이 정당한 발굴이 아니요 도굴인 만치 속히 처분하여야겠다는 □념(念)도 있고 속히 체전(替錢)하려는 욕심도 있어 돈 될 만한 것은 금시에 처분하되 그렇지 않은 것은 파괴유기(破壞遺棄)하여 후에 문제될 만한 증거품을 인멸시킨다. 혹 동철기(銅鐵器)같은 것은 금이나 은이나 아닐까 하여 갈아보고 금은으로 만든 것은 금은상점으로 가서 금은 값으로 처분코 마는 모양이다. 도자 같은 것은 정통적인 것만 돈 될 줄 알고 학술상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던지 골동적으로 특히 자미(滋味)있을 것 같은 것은 모르고 파기(破棄)하는 수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