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朝光)』 1937년 3월호 특집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珍品蒐集家秘藏室歷訪記)' 가운데 고전(古錢) 수집가 황오(黃澳) 인터뷰 기사의 나머지 부분이다.
고전 수집가 황오, 『조광』 1937. 3월 호.
기자는 다시 현품 중에서 조선통보 한 개를 꺼내어
‘이 돈은 현재 한 개에 몇 원 가치나 갑니까?“
“60원 가치요”
“십전통보는요?”
“한 개에 5원 가량 되지요”
“상평통보는 어떻습니까?”
“그 돈은 흔하니만치 근으로 매매합니다. 그러나 상평통보 1면에 경(經)이니 평(平)이니 무(武)니 호(戶)니 하고 글자가 있는데 글자 하나만 있는 것이 값아 퍽 비싸지요. 고물이란 얻기 어려운 것이면 값이 나가니까요. 그래서 희귀품이면 위조도 많습니다.”
하고 상평통보 위조품 하나를 꺼내어 기자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문외한인 기자는 어느 것이 진품이고 가품인지를 알 수가 없다. 씨의 말을 들으면 위조품은 쇠가 다르고 좀 엷다고 한다. 씨는 말을 계속하여
“조선 은전의 시초는 대동(大東)이라는 것인데 이태왕 19년에 되었지요. 지금 가격으로는 삼 사원 가량 되지요.”하고 딴 상자를 펴놓으신다. 그 중에 이십 량이라고 써놓은 돈은 손 바닥만한 데 참 탐스럽고 훌륭하다. 그 돈은 주조지가 대판(大阪)인데 지금은 좀처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기자는 화제를 돌려,
“조선에 돈이 생기기 전에는 물물 교환이었던가요”하고 물었더니,
“아마 물물교환도 하였고, 혹은 중국 돈을 사용한지도 모르지요. 지금 경북에 명도(名刀)라는 중국 돈을 굴출(掘出)하고 개성에서 오수(五銖)라는 중국 돈을 파냅니다. 이것으로 보아, 중국 돈을 쓰지 않았나 추측하지요. 자, 실물을 보시겠습니까?”
하고 딴 상자에서 중국 고전을 꺼내 놓으신다.
황오, 「오대산의 표정은 인자한 어머니인 듯 - 한강의 원천 간통수(干筒水)는 여기 있다」(4),
『동아일보』 1937. 7. 9
칼 같은 돈, 거북이 같은 돈, 붕어 같은 돈, 원숭이 같은 돈― 실로 이것이 돈인가 하고 놀랄만한 여러 가지 돈이 많다. 돈이 아니고 나무를 깎고 과실을 벗길만한 칼이며, 또는 손에 들고 완상하고 구경할만한 완구품이다. 어째서 이것이 그들에게 돈으로 사용되었는가? 생각한즉 실로 진기하기 짝이 없다. ‘월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와 같이 소위 항시기(航時機)를 타고 옛날로 돌아가 그때 정조를 맛보는 듯하다. 기자는
“왜 돈으로 이렇게 칼의 형을 취하였을 가요?”하고 일탄을 보내었다.
“글쎄요 잘 알 수가 없지요. 요컨대 그때 사람들이 자기신변에 가장 가깝고 실용되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는지요. 중국 돈으로 경폐(磬幣)라는 돈이 있는데 이것은 전혀 실내장식품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는 첨족포(尖足布)니 어포(魚布)니 하는 돈이 있습니다. 이상야릇한 것이 많지요!”
하고 한편에서 또 중국고전을 꺼내어 놓으신다.
두 발이 달리고 창 같은 혹은 도미 같은 돈 ― 참말 그 진기한 것이 옛날 신화나 듣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기자는 신비로운 옛날의 정조를 생각하며 “그러면 중국은 언재부터 돈이 생겼습니까?”
“사기(史記)에 의하면 요순(堯舜) 때부터 돈이 생겼다 하나 그것은 자세히 알 수가 없고 완전히 동의 형태를 가지게 된 때는 진(秦)나라 때부터입니다.”하고 설명하신다.
사실 세계에 있어서 돈은 중국에서 제일 먼저 발달되었고 그 종류 그 형태를 몇 백 몇 천으로 헤아릴 수 가 있다고 한다.
씨의 갖은 중국 돈만 하여도 백여 종이 넘고 그 개수가 사 오 백개 이상에 달한다. 기자는 태도를 고치며
“이렇게 돈을 많이 모으시니 장차 부자가 되겠습니다.”하고 농담을 건네었다.
“글쎄요……” 씨의 얼굴에도 유머러스한 표정이 잠깐 지나간다. 씨의 말씀을 들어보면 조선 고전과 중국고전을 합하여 근(近) 천개 가량을 수집하였고 그 수집가격이 이 삼 천원은 되는 모양이다. 딴사람이 가질 수 없는 이러한 아름다운 세계를 가지고 홀로 신비의 삼매경에 소요하시는 씨를 못내 부러워하고, 씨의 집을 나오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