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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1930년대의 수장가: 황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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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朝光)』 1937년 3월호 특집인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珍品蒐集家秘藏室歷訪記)' 가운데 한상억, 이한복, 이병직에 이은 고전(古錢) 수집가 황오(黃澳) 인터뷰 기사이다.

고전 수집가 황오의 정확한 인적사항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민족운동가이자 언론인󰋯정치가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 1930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후 1931년 유성사(流星社)에서 출간한 "백두산등척기"에 이름이 나온다. 1931년 12월에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우회에서 간행한 『양정(養正)』 8호가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낸 엄주익(嚴柱益) 추모 특집으로 간행될 때 박영철 등과 함께 '만장(輓章)'을 썼고 아울러 특별회원으로 쓴 「제14회 졸업식 날 몇 조각 감상」에 "우리 선생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정고보를 나오지 않았지만 양정고보 선생으로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오대산의 표정은 인자한 어머니인 듯 - 한강의 원천 간통수(干筒水)는 여기 있다」(4)를 『동아일보』 1937. 7. 9일자에, 「하이킹」을 『여성(女性)』 제2권 제11호(1937년 11월)에 발표하였고, 1946년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조선문필가대회에 황오의 이름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서 북한의 고고학자 도유호(都宥浩)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대하여 ‘재만주설(在滿洲說)’과 ‘재평양설(在平壤說)’로 갈리게 되었는데, 이후 약 10여 년간 토론을 거듭하면서, 1961년 김석형(金錫亨)을 비롯하여 이지린(李趾麟)·임건상(林健相)·이상호·백남운(白南雲) 등 많은 문헌사가들이 ‘재만주설’에 동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도유호를 비롯한 황철산(黃鐵山)·정찬영(鄭燦永)·황욱(黃澳) 등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재평양설’은 점차 소수설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의 '황욱(黃澳)'이 황오와 동일인물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조사된 경성미술구락부의 도록 및 일제시기의 미술관계 자료 등에서 옛 동전 관계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황오가 월북 역사학자였다면 화폐를 통해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의 흐름을 연구하려고 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오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조광』 1937. 3월호 특집 ,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 43쪽.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신운미(神韻味)  고전(古錢)수집가 황오 씨

고전(古錢) 수집가로 유명하신 황오(黃澳) 씨를 찾게 되었다. 고색이 창연한 고전을 만지시며 예술의 신운미를 만끽하시는 씨는 보통 애전가(愛錢家)와는 다른 의미의 애전가이다. 기자는 인사를 하고 래의(來意)를 말한 후에

  “고전을 수집하시는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까?” 하고 화제를 꺼내었더니 씨는 처녀같이 수줍어하는 태도로 “천만에 수집이 무슨 수집이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못 취미로 몇 개 모았지요.”하고 겸손을 떠신다.

  기자는 뱃심 좋게 현품구경을 간청하였더니 씨는 기자의 간청을 저버리기 어려우심인지 그야말로 청태(靑苔)가 낀 듯한 고전을 한 개 두 개 꺼내 놓으며 “다못 사 오 년 전부터 진기하고 이상해서 몇 개 몇 개 모으기 시작한 것이 그럭저럭 몇 백 개 되엇습니다.”하고 먼저 조선 고전을 꺼내 놓으신다. 씨의 말을 들으면 조선 돈은 지금으로부터 구백사십일년전 고려 성종 때에 비로소 생겼는데 그것이 곧 무문(無文) 철전(鐵錢)이라고 말씀한다. 기자는 씨의 버려놓은 목갑(木匣)에서 조그만 철전을 손에 들어 이리저리 뒤져보고 참 희귀한 것이라고 칭찬한 후에 “조선 돈은 몇 가지나 됩니까?”하고 일문(一問)을 발하였더니 씨는 당황히 책상을 뒤져가지고 『동양화폐연표(東洋貨幣年表)』를 꺼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황오, 「제14회 졸업식 날 몇 조각 감상」, 『양정(養正)』 8호, 1931. 12


  “조선 돈은 십여 종이 됩니다. 연대순으로 말하자면 무문철전(無文鐵錢), 동국중보(東國重寶: 穆宗 5年),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전통보(三錢通寶), 삼전중보(三錢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원보(海東元寶: 肅宗 2年), 조선통보(朝鮮通寶: 世宗 5年), 십전통보(十錢通寶), 상평통보(常平通寶), 은전(銀錢) 등입니다.”하고 일일이 실물을 반증하며 설명하시는데 조선 돈은 그리 변환이 없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청태가 퍼렇게 끼고 녹이 지득지득 낀 이러한 돈을 모두 어디에서 모았는가 하면 실로 진기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수집하시기에 퍽이나 힘이 들었지요. 그 고심담을 말씀해 주시요.”하였더니, 씨는 별 고심이 없다는 듯이

  “뭐 고물상에서 좀 사들이고 친구들에게 양수(讓受)하고 별로 고심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제문제와 시간문제가 제일 큰 문제지요. 경제가 허락한다면 좀 더 철저히 모아 보겠지 만은요.”

  하고 잠깐 눈썹을 흐리신다. 씨는 말을 계속하여
  “최근 우리가 쓰던 상평통보도 세 가지가 있는데 인조 11년에 된 것과 이태왕(李太王) 3년에 된 것과 이태조(李太祖: 李太王의 誤記) 20년에 된 것 세 가지가 있지요. 제가 지금 가진 것은 육십 여개 입니다.”하고 기쁘신 듯이 현품을 손으로 만지신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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