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朝光)』 1937년 3월호 특집인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珍品蒐集家秘藏室歷訪記)' 가운데 한상억, 이한복에 이어 이병직(李秉直: 1896-1973) 인터뷰 기사이다.
송은(松隱) 이병직은 대한제국기의 내시(內侍) 출신의 서화가로서 근대의 주요 수장가, 미술품 감식안(鑑識眼), 당대를 대표하는 부자의 한 사람이었다.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서 김규진(金圭鎭)의 서화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에 12회나 입상하였고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글씨는 김규진의 대자(大字)를 본받아 곳곳에 많은 현판을 남겼으며, 그림 또한 김규진의 영향을 받았는데 사군자 중에서도 난과 죽을 잘 그렸다. 그의 수장품을 경매한 세 차례의 경매회(1937, 1941, 1950)는 그 규모와 유물의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켜낸 집념은 유명하다.
이병직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조광』 1937. 3월호 특집 ,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 36-37쪽.
종소리 은은한 한산사도(寒山寺圖) 아래서 고서화수집가 이병직씨
우리는 서화예술을 사랑하고 수집하는 사람으로 이병직(李秉直) 씨를 잊을 수가 없다. 기자는 익선정(益善町) 그의 자택으로 씨를 찾았더니 씨는 반가이 그의 서재로 안내하여 준다. 서재의 사면 벽에는 좋은 서화가 쭉 걸려있고 책상 한 옆에는 사시장춘(四時長春) 절개를 자랑하는 소나무 분(盆)이 아담히 놓여있다. 그리고 서재 정면에는 ‘고경당(古經堂)’이라는 김완당(金阮堂)의 액자가 붙어있다. 기자는 래의(來意)를 말하고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서화를 수집하시는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까?”하였더니 씨는 잠깐 눈을 감고 손을 꼽아보더니 “아마 근(近) 이십년 되었지요”하고 쾌활히 대답하신다.
“서화를 수집하게되신 동기는요”
“네― 어려서부터 서화를 공부하였고 따라서 그 방면에 취미를 가지게 된 탓이지요.”
“실례지만 그간 수집하신 점수는 몇 점이나 됩니까.”
“근 이백점 됩니다. 그 중에 서와 화가가 근 반분되지요.” 이렇게 의식적으로 문답을 계속한 후에 기자는 한걸음 가까이 다가앉으며
'양주중학교 설립에 40만원을 혜척(惠擲)한 이병직', 『동아일보』 1939. 9. 9. 이병직은 교육 사업에도 많은 돈을 기부한 모범적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할 만하다. |
1934년 6월 22일에서 30일까지 개최된 '조선 중국 명작 고서화전람회'에 이병직은 장택상 다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아일보』, 1934, 6, 22일자 사고(社告) |
“수집에 대한 고심담을 좀 알려주시오”하고 일탄(一彈)을 보냈더니
“뭐 별것 있나요. 말하자면 골동품상점을 순례하며, 혹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자동차로 쫓아다니는 일도 있으며 또는 원하는 물건을 사려다가 사지 못하고 몇 날씩 속을 태우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내가 얻으려는 물건을 얻게 되는 때이면 여간 기뻐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이나 딴 것같이 유쾌합니다.”하고 씨는 옛날 어떤 화려한 장면을 회상하는 듯이 미간에 웃음이 슬쩍 지나간다. 이야기는 점입가경으로 씨의 가진 그림 중에 가장 진품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씨는 벽장에서 큰 서폭 한 개를 꺼내어가지고 득의의 웃음을 웃으며 말은 겸손하시나 속으로는 좀 진귀한 그림이라는 듯이 “아마 현재 조선에 있는 그림 중에 가장 오랜 그림일 겁니다. 오백년 전 그림이지요.”하고 벽에 걸어놓으신다. 산수화인데 얼른보아 비범한 그림에 틀림이 없다. 씨는 말을 계속하여 “이 그림은 한산사도(寒山寺圖)인데 김뉴(金紐) 씨의 그림입니다. 가격은 약 일 만원 가량 되지요. 김 씨는 세종 2년때 사람인데 자는 자고(子固)요 호는 금헌(琴軒)이며 안동사람입니다. 그림을 썩 잘 그렸지요.”하고 만족한 웃음을 웃으신다.
도 4) 김뉴(金紐: 1420-?)의 <한산사도(寒山寺圖)>
(1937년 이병직 수장품 경매시 출품, 아래 세 점 모두 같은 경매회에 출품됨)
“이러한 좋은 그림을 처음 얼마에 입수하셨습니까?”
“네 이 그림은 어떤 사람이 자기방문에 붙여둔 것을 장택상(張澤相) 씨가 사십 원에 샀었는데 내가 가지고 싶어 하니까 그후 팔 백원에 장씨가 내게 양여(讓與)한 것입니다. 화풍으로나 필획으로나 도저히 요새 사람들이 따를 수 없지요”하고 그 그림을 다시금 바라보신다. 기자는 역시 훌륭한 그림이라고 칭찬을 한 후에 씨의 가진 서화를 대강대강 구경하게 되었다. 벽장문을 열어젖히니 광채가 번쩍번쩍하는 화류목갑(花柳木匣)에 가득히 넣어놓은 그림이 팔십 여점이나 된다. 그 많은 그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단원(檀園)의 곤명지화(昆明池畵)와 전렵화(畋獵畵)와 변화재(卞和齋)의 군계도(群鷄圖)와 송인(宋寅)의 산수화, 김완당(金阮堂)의 난화(蘭畵)가 가장 이채가 있는데 그 그림은 모두 사 오 백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기자는 그 찬연한 예술에 반쯤 취하고 반쯤 황홀하여 극력 칭찬하고 화제를 돌려 수집가의 최고 열락(悅樂)의 경지를 물었더니 “그 진진(津津)한 재미야 어떻게 말로 다하겠소.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만사를 잊고 전아한 예술의 경지에서 홀로 기뻐할 뿐이겠지요.”
도 5) 김홍도의 <곤명전렵도(昆明畋獵圖)> 쌍폭
도 6) 강세황·마군후 제발(題跋), 변상벽의 <계도(群鷄)>
하고 지금도 그 높은 예술의 경지에 헤매는 듯이 즐거운 표정을 하신다. 기자도 옳은 말이라고 머리를 숙인 후에 다시 씨의 수집한 글씨를 보기 시작하였다. 씨의 소장한 백여 점 중 가장 진기한 것은 김추사(金秋史)의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이라는 해자(楷字)이다. 이 글씨는 전남도 해남군에 대둔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에 초의(草衣)라는 도승(道僧)이 있었다고 한다. 김추사가 이 중과 매우 절친하여 피차 서문(書文) 왕복도 사 오 백번 하였는데 특히 그 중에게 주는 기념으로 밀다심경(密多心經)이라는 불경을 써서 비단 소지(素紙)를 붙여 보낸 것인데 참말 진품이라고 한다. 문외한인 기자로도 잠깐 뒤적여 보았으나 참말 잘 쓴 듯하였다. 기자는 또 타산적 문구를 걸고 “이 글씨가 현재 시가로 얼마나 됩니까.”하였더니
“시가로 일천 이백 원 가량 되지요. 그러나 일천이고 일 만원이고 이것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진서(珍書)이니까요”
도 7) 김정희의 <반야바라밀다심경>
하고 만족한 웃음을 띄신다. 그 외에 김추사의 ‘고경당’이라는 액자와 송이암(宋頤菴)의 글씨 등이 매우 이채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이 ‘고경당’이라는 글씨는 씨가 가장 좋아하는 글씨로 그 전아하고 우미한 필치에는 매우 감복하여 처음 입수하였을 때에는 춤을 추다시피 기뻐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자기 서재를 고경당이라 하고 또는 자기 집을 고경당이라 한 것은 전혀 그 글씨를 애호하고 경복(敬服)하는 뜻에서 그리 한 것이라고 한다. 기자는 씨의 심경을 이해하는 듯이 몇 번이나 경의를 표하고 다시 기운을 내어
“지금까지 수집하시느라 쓰신 돈이 몇 만이나 됩니까.”하였더니 씨는 묵묵히 앉아서 한참 생각하다가
“아마 사 오십 만원은 넉넉히 되겠지요. 그러나 이 돈을 일조일석에 쓴 것이 아니라 몇 십 년을 두고 쓴 돈이니 까요”하고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잠깐 눈을 호리신다. 그리고 수집생활을 하는 동안에 여러 동호자들이 많아서 늘 회합하고 상종하며 수집담과 예술담으로 밤을 새우는데 씨의 행복과 생활의 탄력을 모두 여기 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