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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 1930년대의 수장가: 이한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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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는 잠깐 말을 그치고 한숨을 쉬신다. 기자 역시 비분한 마음으로 잠깐 머리를 숙였다. 씨의 말을 들으면 씨는 목기 삼백점, 서화 각 사오백점을 가졌고 그 외에 염주 십 여종, 열쇠 이십 여종, 등(燈) 십 여종, 도자기 이삼백 여점이 있는데 더욱이 조선 사람으로는 누구나 가지지 못한 도장을 사백 여점을 가졌다고 한다. 사실 머리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니 도장포(圖章鋪)나 경영하시는 듯이 올망졸망한 도장이 수 백 여개 쌓여있다. 기자는 이야말로 진기한 물건이라 생각하고 “참 훌륭하시군요”하였더니


이한복은 손꼽히는 수장가이자 추사 연구자로서
추사에 대한 글을 여럿 남겼고 강연도 하였다.
이한복 강연 ‘완당 선생’, 『매일신보』,
1938. 5. 28

‘秋史珍藏’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이
김정희에게 보낸 인장.
이한복의 손을 거쳐 화가 월전 장우성이 소장했다.


 “천만에…, 도장 하나만 제대로 수집하려해도 일생을 두고 힘써야 그 반도 할 수가 없지요”
  씨의 말은 겸손하나 속으로는 만족을 느끼시는 모양이다. 기자는 현품구경을 청하였더니 씨는 전황석(田黃石)에 새긴 사각도장 한 개를 꺼내면서

  “이 도장이야말로 진품입니다. 김추사(金秋史)가 쓰던 도장이지요. 좀처럼 구하기 어렵지요”
  하고 기자에게 보이신다. 얼른 받아보니 ‘추사진장(秋史珍藏)’이라고 새겨있다. 이 도장은 각인가(刻印家)로 청조사대가(淸朝四大家)의 한사람인 옹방강(翁方綱)의 아들 옹수곤(翁樹崑)이 추사에게 새겨 보낸 도장인데 추사가 그린 그림이나 글씨에는 많이 찍은 도장이라 한다.

  “참 진품이군요. 어디서 이러한 진품을 입수하셨습니까?”하고 기자는 또 저널리즘의 제육감(第六感)을 주워내었더니 씨는 이것만은 비밀이라는 듯이

  “그저 어디서 묘하게 사들였지요”
  하고 말끝을 흐리는데 그 도장은 적어도 현재 몇 백 원 가치는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씨는 말을 계속하여



김정희의 영향이 느껴지는 이한복의 글씨,
『동아일보』, 1939. 1. 5



이한복, <여름의 금강산(夏金剛)>, '10대가산수풍경화전' 출품작,
『동아일보』, 1940. 5. 30


  “도장은 중국에서 많이 발달되었지요. 명조(明朝)에 시작되어 청조(淸朝) 말에 대성한 셈인데 참 훌륭한 것이 많습니다. 서화에 있어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가장 최후의 일인데 그 도장을 찍은 것을 보아서 그 작자의 식견을 알 수 있지요. 도장 찍는 것이 여간 중대하지 않습니다.”

  씨의 말은 도도하여 어디까지든지 학자의 풍을 가지고 있다. 기자는

  “그러면 조선에는 언제 도장이 생겼습니까? 그리고 그때 도장의 형태는요?”하고 일시(一矢)를 보내었더니 씨는 서슴지 않고

  “고려 때에 생겼지요. 지금 굴출(掘出)되는 것을 보면 작은 철장(鐵章)이 많습니다. 지금 같은 목장(木章)은 없었지요”하고 대답하시는데 사실 씨의 책상 옆에는 손톱 같은 철장들이 수두룩하다. 씨는 씨의 수집한 물건을 가격으로 논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는 모양으로 “지금까지 도장을 수집하시기에 얼마나 돈을 소비하셨습니까?”하였더니



이한복 소장, 이한철(李漢喆: 1808-?)의 <추림독서(秋林讀書)>, 『조선고적도보』 14, 도 6016.


  “돈 말씀은 그만두셔요. 우리는 예술품을 돈으로 이야기하는데 아주 질색이오”하고 솔직히 고백하신다. 그러나 씨의 말하는 어조로 보아 도장을 수집하시기에 몇 천원 쓴 모양이다. 씨는 이 앞으로도 옛날 명인의 인장을 많이 모아볼 모양이라 하니 매우 즐거운 일이다. (끝)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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