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朝光)』 1937년 3월호 특집인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珍品蒐集家秘藏室歷訪記)' 가운데 한상억에 이어 이한복(李漢福: 1897-1940) 인터뷰 기사를 2차례에 걸쳐 전재하자 한다.
이한복의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무호(無號), 초호는 수재(壽齋)이며, 낙관(落款)에는 이복(李福)이라 쓰기도 하였다. 어려서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에게 전통화법을 배운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8년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원으로 1921년 첫 협회전람회부터 줄곧 참가하였고, 1922∼1929년까지는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였다. 1920년대의 청년작가 시기에는 근대적인 일본화풍과 서양화법에서 자극을 받은 현실적 시각 및 정감의 사실적인 채색표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930년 무렵부터는 전통적 한국화 취향으로 돌아가 수묵담채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그렸다.
1940년 오봉빈(吳鳳彬)이 운영하던 조선미술관에서 관계사회의 원로와 안목인사들의 추천 및 논의를 거쳐 선정한 ‘10대가산수풍경화전’을 개최할 때 이한복도 포함되었다. 서울의 휘문․보성․진명 등 여러 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역임하였고, 고서화의 감식안목이 높았다.
근대의 주요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장택상이 그의 나이 41세 때인 1933년에 대구에서 서울의 수표동으로 이사한 후 장택상의 집은 호사가들의 공동 회합장소가 되었다. 수표동 장택상의 사랑방은 일종의 '살롱'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 고미술품 유통사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당시 장택상의 사랑방에 모이던 인사는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친일귀족으로 기업가인 한상억, 배화여중 교장을 지낸 이만규, 화가 도상봉, 서예가 손재형, 의사 박병래 등이었는데, 이한복 역시 이 모임의 주요 구성원 가운데 하나였다. 이한복은 서예 특히 추사 김정희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도장의 원각탑 수집삼매에 취하신 이한복씨', 『조광』 1937. 3월호 특집 , ‘진품수집가비장실역방기’, 36-37쪽.
도장(圖章)의 원각탑(圓角塔) 수집삼매(蒐集三昧)에 취하신 이한복씨
화가로 골동수집가로 우리는 이한복(李漢福) 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궁정동 자택으로 씨를 찾았더니 씨의 서재에는 그림, 글씨, 염주, 열쇠, 도자기, 인장 등 형형색색의 고물(古物)이 즐비하여 어떤 골동상을 찾아온 듯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참 굉장하군요. 골동상을 하셔도 넉넉하겠습니다.”
“천만에. 하기는 여러 가지 방면에 취미가 있어서 무엇이든 모아보기는 합니다.”
“언제부터 수집에 유의를 하셨나요.”
“학생시대부터 한 개 두 개 모으기 시작했지요―”
“그러면 수집에는 원조시군요”
“원 천만에…”
이렇게 기자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기자는 바싹 한걸음 다가앉으며 차를 마시고,
“그래 이렇게 많은 물건을 수집하기에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그 고심담을 좀 말씀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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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전을 앞에 두고 제작에 바쁜 화백들 (2) 무호 이한복 씨 금강산 수제(數題) 집필 중, 『동아일보』 1928. 10. 26 (당시 31세) | 『조광』과 인터뷰 중인 이한복 (당시 40세) |
“뭐 고생될 것이 있소. 몇 십 년을 두고 모은 것이니까 그럭저럭 자연히 모아진 셈이지요. 그러나 고심담이야 많지요. 어디 갑자기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고심담 중에 한 가지만 이야기해 주세요. 조그만 일화라도 좋으니까요.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제공하십시오.”하고 기자는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젖을 달라 듯이 간곡히 청하였다. 씨는 기자의 이 돌연한 질문에 생각이 막혔는지 머리를 들어 무엇을 생각더니 다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돌며
“고심담이야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가지는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수집가란 외출만하면 반드시 언제나 고물을 한 두 개씩 들고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지요. 웬 쓸데없는 물건을 자꾸 주워 들이느냐고요. 고물을 일일이 물에 씻어 놓기가 싫증이 난다고요. 그때마다 쓴웃음을 웃었습니다.”
씨의 얼굴에는 잠깐 검은 구름이 지나간다. 기자도 옳은 말이라고 얼굴을 숙이고
“그래 오랜 세월을 가지시고 조선고대공예품을 수집하셨으니 조선 물품에 대한 특징을 말씀하여 주시요”하고 일탄(一彈)을 보내었다. 씨는 서슴지 않고
이한복, <부상도(扶桑圖)>, 『동아일보』, 1920. 7. 26 |
이한복 시필(試筆), 『동아일보』, 1923. 1. 1 |
“조선 물건이란 외국품과 비하여 출발점이 전혀 다릅니다. 천개면 천개, 만개면 만개― 형이나 색이나 선이나 모두 다르지요. 그것은 물품을 만들 때에 팔려고 만든 것이 아니고 자기가 쓰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물품에 정교우미(精巧優美)는 말할 것도 없고 각 물건마다 거기 개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중한 물건이 지금은 전부 외국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좀처럼 구하기 어렵습니다.” 씨의 말에는 열이 있고 힘이 있다. 씨는 다시 말을 계속하여
“옛날 조선 물건을 수집하여 보면 참말 전아우미(典雅優美)하여 거기는 조선의 천재적 기예가 숨어있지요. 외국 사람들이 보고는 모두 놀랍니다. 왜 지금의 조선 사람은 그렇게 힘이 없고 재주가 없느냐고요”
씨의 얼굴에는 옛날을 회상하는 비장한 표정이 잠깐 지나간다. 기자 역시 씨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옛날의 우리 조선(祖先)은 그렇게 훌륭하였는데 왜 지금의 우리들은 이렇게 못났을까요.”
“모두 이조 오백년에 대한 정치가 나쁜 까닭이겠지요.”